방송인 김어준 씨의 발언이 또 화제이다.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프로그램에서 ‘미투운동’이 앞으로 정치공작의 소재로 이용당할 수 있다고 발언한 것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이 김어준 씨의 발언에 곧바로 반발하면서 김어준 씨의 발언은 곧바로 보수언론의 먹잇감이 됐다. 조선일보는 25일 인터넷판에 <김어준 “미투, 진보적 文정부 지지자 분열 공작”>이란 제목으로 논란을 보도했다. 중앙일보도 <김어준 “미투 운동, 文정부 분열” 논란…여권서도 “사과해야”>란 제목을 달아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보수언론의 이러한 제목 뽑기는 사실왜곡에 가깝다. 김어준 씨의 발언은 미투운동 자체가 어떤 기획이나 공작이라는 게 아니라 앞으로 미투운동이 보수세력의 정치공작에 이용될 수도 있다는 주장에 가깝다. 그래서 김어준 씨는 자신의 발언에 “예언”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동아일보의 경우 같은 날 인터넷판에 <“미투 운동, 文정부 분열 공작 이용될수도” 김어준 발언 논란>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는데, 이 경우가 그나마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조선일보 25일 인터넷판 기사 일부

김어준 씨의 우려(?)에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보수세력이 확산되는 미투운동에 자신들에 유리한 정치적 프레임을 덮어씌우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보수언론은 고은 시인이나 연출가 이윤택 씨 등의 정치적 성향을 진보에 가까운 것으로 규정하면서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전형적인 주장을 선보여 왔다.

조선일보의 경우 지난 23일 1면에 <정의 인권 외치던 그들의 이중성>이란 제목의 기사로 이 프레임을 진보적 문화예술단체 및 시민단체 일반에까지 확장시켰다. 고은 시인이나 이윤택 씨가 ‘같은 진영’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작가회의, 여성단체연합, 민변 등 ‘좌파 성향 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이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당 국회의원을 음해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소위 미투 운동이 좌파 문화 권력의 추악함만 폭로되는 부메랑으로 갈 줄 저들이 알았겠는가”라면서 “뿌린 대로 거두는 게 세상 이치”라고 썼다. 지난 대선 국면에서 제기된 이른바 ‘돼지발정제’ 문제를 포함해 성평등에 대한 요구 일반을 ‘공작’으로 규정하고 이의 부당함을 강조한 것이다.

23일 조선일보 1면 기사

이런 흐름을 보면 이후에 보수세력이 미투운동을 어떻게든 자신들에 유리한 정치적 소재로 얼마든지 이용하려 들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은 그럴듯한 배경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문제는 우리 사회가 성폭력 또는 성평등 문제를 다루는 방식 자체에 있어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구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성폭력 피해 폭로 문제를 공적인 영역에서 다룰 때는 최대한의 윤리적 섬세함이 필요하다.

당장 김어준 씨의 발언이 이후 나올 수 있는 폭로에 미칠 영향을 헤아려 보자. 이제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피해자들은 지금보다 더 악랄한 방식으로 양쪽에서 ‘의도’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잖아도 성폭력 피해 폭로의 ‘의도’는 지금도 매우 고약한 방식으로 다뤄지고 있다. 앞서 서지현 검사의 사례를 상기해보자. 검찰의 이해관계에 예민한 사람들은 폭로가 검찰의 권한을 축소하려는 정권의 의도에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또는 검사 개인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인사 원칙을 흔들려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우려를 제기했다. 그러한 ‘의도’를 문제 삼는 온갖 주장 속에서 성폭력이 벌어진 상황과 이후 이것이 축소 은폐되는 과정 자체에 대한 여러 문제적인 쟁점들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김어준 씨의 발언은 당시 서지현 검사의 사례를 두고 바람직하지 못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의 ‘거울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즉, 성폭력 피해라는 문제의 본질에 파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똥 묻은 개와 또 다른 똥 묻은 개의 싸움’이라는 냉소적 정치 구도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길을 스스로 선택한 셈이 되었다는 얘기다. 이런 일만 반복해서는 백년이 지나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보수세력의 악의적 프레임에 대한 반론은 근본적 차원에서 제기해야 한다. 성폭력 문제는 결국 권력관계의 문제이다. 권력을 가진 쪽이 가지지 못한 쪽을 착취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얘기다. 고은 시인이나 연출가 이윤택 씨 등의 성폭력 행위는 ‘진보의 이중성’이라는 어떤 정치 지향의 일반적 특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들이 어떤 정치적 지향에 있어서는 소수파에 속한다 할지라도 성별 권력 격차라는 관점에선 그들의 위치가 기득권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정치의 대응은 바로 이 기득권의 권력 관계를 폭로하면서 이를 시정하기 위한 행동을 즉시 모색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지, 이런 저런 냉소적 세계관을 동원해 성별 위계에 따른 권력관계가 유지되는 상황을 결과적으로 방치하는 게 될 수 없다. 비록 그러한 시도가 당장 눈앞의 정치적 이해를 따질 때 불리한 결과를 불러온다 하더라도, 또는 ‘선비질’이라는 악선동에 말려 폄하를 당하는 신세가 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이것만이 ‘영원히 사는 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에 대한 임종석 비서실장의 발언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다. 자유한국당이 탁현민 행정관의 예를 들면서 “이런 사람을 두고 어떻게 청와대가 이 (미투) 운동에 앞장선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한 것에는 당연히 ‘악의’가 실려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바람직한 대응은 탁현민 행정관을 꼭 해고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성인지적 감수성 부족에 대한 이러저러한 조치를 취하고 있고 이에 따른 결과를 어떤 방식으로 내놓겠다는 구체적인 대응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어떤 진정성의 문제 등 또 다른 논란을 낳더라도 “직접적 피해자가 있는 성적 폭력과 구분돼야 한다”고 답하는 것보다는 장기적으로 공동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

조선일보의 악의적 프레임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다. 연출가 이윤택 씨가 문재인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여서 정부 핵심 인사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악의적 주장’이 문제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음모니 공작이니 하면서 미리 한 자락 깔아 놓을 필요가 전혀 없다. 문재인 대통령 본인이 자신과 가까운 사이라고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시절 누가 “경남고” 얘기만 꺼내도 아예 돌아앉아 버렸다는 일화가 남을 정도이다. 정치공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런 장점을 과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소 늦었더라도 ‘가까운 사람’에게 더 철저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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