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은 고비를 넘겨 또 다른 고비를 맞는 일의 연속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남북관계의 중대 고비를 하나 넘는가 했는데 통상과 산업 분야의 악재가 문재인 정권에 부담을 주고 있다. 미국 정부가 한국산 철강 관세 부과 검토에 돌입했고 GM의 한국 사업 철수 가능성이 불거진 것이다.

두 사안은 명백히 다른 사안이지만 보수세력에 의해 이념적 공세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먼저 미국 정부의 한국산 철강 관세 부과 문제이다.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은 이 문제를 한미동맹의 균열과 이른바 ‘친중노선’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중국의 사드 보복에 침묵하고 오히려 ‘3불약속’을 해주는 등 중국에 기울어진 모습을 보인데다 미국을 위협하는 북한에 대해 온건한 태도로 일관함으로써 미국의 한국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기본적인 ‘호의’를 갖고 접근해야 할 한미관계를 “이른바 동맹(so called ally)” 수준으로 격하하도록 해 일본과 캐나다 등 다른 동맹국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는 일을 한국 정부가 스스로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당하고 결연하게 대응하라”고 주문하고 정부 당국이 미국을 WTO에 제소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기로 한 것조차 문제 삼고 있다. 중국의 사드 보복에는 침묵했으면서 왜 미국을 상대로는 이런 액션을 취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답은 “경우가 다르다”는 말로 요약이 가능하다.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드 배치에 대한 경제적 보복 조치를 부정하고 있는 상황과 미국 상무부가 대통령에게 제출할 보고서에 구체적인 고율 관세 부과 방침을 밝힌 것은 당연히 대응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러나 정부의 설명에도 쟁점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결국 현재 조건에서 안보와 통상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쉽게 결론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1차적으로 미국의 태도 때문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특히 대중관계와 관련해 안보와 통상을 하나로 묶는 전략을 써왔다. 남중국해 문제에 공세적으로 접근하면서 중국의 무역불균형 문제를 함께 제기하는 식이다. 이런 태도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는 상황이 조성되면서 대북문제에 있어서의 중국역할론으로 다시 표출되었다. 중국이 지정학적 이해관계 때문에 북한에 대한 극한의 제재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대북리스크가 증가하고 있고 이런 상황이 무역불균형 시정 필요성의 주요 근거가 된다는 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연합뉴스)

트럼프 행정부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자신들이 이득을 보는 구조를 만들고 ‘미치광이 전략’으로 이를 지탱하는 행동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앞의 상황을 예로 들자면 중국이 무역불균형 시정 압력에 굴복해 대북압박을 심화하면 안보라는 측면에서 이득이 되고, 북한을 지키느라 대중무역제재 명분을 내주면 통상이란 측면에서 그것 또한 이득이다. 이런 행태는 그간 형성돼온 국제질서의 어떤 명분에 개의치 않겠다는 마인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데, 이는 앞서 언급한 ‘미치광이 전략’ 때문에 가능하다.

중국산 철강 문제는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통상분야의 현안이었지만 트럼프 행정부에 와서 다시 안보-통상 논리로 모습을 바꿔 재등장했다. 여기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중국이 안보에 있어서는 해상에서 북한에 원유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통상에 있어서는 철강재를 한국을 통해 가공해 우회수출하는 전략으로 제재를 우회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관세 부과 논리가 안보와 통상을 연계할 수 있도록 한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트럼프 행정부에 절실한 것은 11월 중간선거에서 핵심 지지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성과이다. 중간선거를 망치면 그렇잖아도 러시아 스캔들 때문에 발목이 잡혀있는 국정운영능력의 유실이 가팔라진다. 앞서 언급한 ‘꽃놀이패’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북핵 위협을 제거하였다거나 중국과의 무역불균형 문제를 해소해 일자리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둘 중의 하나도 좋고 둘 다 여도 좋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국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수 있는 수단은 극히 제한된다. 중국산 철강재의 우회수출 비중이 크지 않다는 ‘논리적 설명’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보수세력의 주장대로 ‘한반도 운전자론’을 포기한다고 해서 안보 분야의 성과를 미국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겨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수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개인적 환심을 사려고 노력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사례를 말하지만 애초에 일본의 중국 철강재 수입 물량이 크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는 걸 봐야 한다.

때문에 남는 것은 여론에 호소하는 전략뿐이다. 동아일보가 21일 지면에서 월스트리트저널 등을 인용해 고관세 부과가 오히려 미국 내 노동자들에게 불리해진다는 논리를 꺼내들 필요성을 촉구하거나 정치권 일각에서 미국일방주의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유럽연합 국가 등과 함께 이 문제에 대응하는 모양을 만들어 안보와 통상을 의식적으로 분리시켜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는 게 이에 해당한다. 관점을 문재인 대통령으로 옮겨오면 “당당하고 결연하게 대응”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애초부터 있지도 않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를 북핵문제와 연계해 보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에 가깝다.

배리 앵글 GM 총괄 부사장 겸 해외사업부문 사장이 20일 오전 국회를 방문 한국GM 대책 TF 위원장등 의원들과 면담전 전담 통역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은 카허 카젬 한국GM 사장. (연합뉴스)

마찬가지 일이 한국GM 군산공장 철수 사태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한국산 철강 고관세 부과 문제보다 훨씬 간명하다. GM이 한국 내 사업을 유지할 의사가 있다면 정부와 협상을 제대로 잘 하면 된다. 그러나 21일 중앙일보 보도를 보면 GM은 지난해 12월 총 8개 항으로 구성된 산업은행의 요구안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군산공장의 사실상 폐쇄를 결정했다. 이 요구안에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GM 본사의 한국GM 법인에 대한 고금리 대출 문제와 불투명한 재무구조 등에 대한 것이 포함돼있다. 불성실한 GM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보수세력은 ‘철밥통 노조’의 고임금과 이에 따른 생산성 저하를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하며 노조의 양보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회사가 어려울 때 노사가 서로 양보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부인할 순 없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회사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부터 따지는 게 우선이다. 회사가 이를 토대로 노조를 설득해야 한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대뜸 21일 사설에 이렇게 썼다. “거액 적자로 망해가는 회사에서 세계 최고 임금을 받고 1000만원 성과급까지 챙겨온 노조가 철밥통을 버려야 한다”, “노조가 기득권을 포기하면 GM이 한국민을 속이려는 것인지 아닌지는 자연스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철밥통 노조’는 회사가 제대로 된 근거를 갖춰 해결책을 제시했음에도 이를 노조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나 꺼낼 수 있는 단어이다. 오히려 현재 한국GM의 노동자들은 양보할 의사가 없는 것이 아니니 회사가 이렇게 된 이유를 제대로 알려나 달라고 말하고 있다.

즉, 조선일보의 주장은 순서가 완전히 틀렸다. 세계 각국의 기득권들이 이렇게 바뀐 순서의 주장을 지금까지 내세워 온 결과가 글로벌 GM의 각국 정부를 상대로 한 ‘갑질’이다. GM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태로 일관하면서도 경영상태를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와 한국의 6월 지방선거라는 요소까지 겹쳐보면 사실 결론은 이미 뻔하다. 조선일보의 태도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서 현 정부의 이념적 지향을 왜곡하는 것으로 보수세력의 정치적 이득을 보장하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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