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의 글을 좋아한다. 최근에 읽은 글도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동아일보 2월 8일자에 실린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떡밥만 뿌리고 가는 낚시꾼은 없다>인데, 이 글은 전반적으로 좋았지만 특히 다음의 네 문단이 최근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 따져보면 역대 최대 규모로 500여 명이나 남쪽에 내려보낸 북한이야말로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다. 아무리 입단속을 하고 감시를 해도 그들이 북으로 돌아간 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말을 할지 알 수가 없다. 최소한 가족 형제에게는 비밀이 없다.

(...) 북한은 무엇을 노리고 있을까. 떡밥의 양과 질을 봤을 때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정도로 만족할 것 같진 않다. 또 미국의 동의 없이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북한의 모사(謀士)들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더구나 북은 목을 내놓고 결재받는 곳이다.

하지만 핵이나 ICBM을 내걸지 않고 미국을 움직일 순 없다. 안 될 것도 없다. 원료 추출 시간이 오래 걸리는 핵무기보단 기술을 이미 확보해 수십 개를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는 ICBM은 얼마든지 흥정판에 올려놓을 수 있다. 사실 북한은 미국까지 가는 ICBM을 굳이 가질 필요는 없다. 미국 영토에 쏴봐야 자살 행위이고, 가진 것만으로도 미국의 분노만 키울 뿐이다. 협박용 핵미사일은 주한미군만 사거리에 넣어도 충분하다.

북한도 지금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적잖게 파악했을 것이다. 말을 얼마나 쉽게 바꾸고, 자화자찬은 얼마나 능숙하게 하는지 등을 말이다. 남한을 활용해 북-미 대화를 성사시킨 뒤 “김정은을 압박해 미국을 핵 공격 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냈다”는 업적을 트럼프에게 만들어준다면 흥정할 수 있다고 계산했을지도 모른다. (...)

이번 뿐만이 아니라 몇 년 전부터 주성하 기자의 글은 내게 좋은 참조점이 됐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내가 참조한 주성하 기자의 글이 언제나 기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성하 기자가 지속적으로 좋은 글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동아일보 소속 기자이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한편 주성하 기자가 가장 진솔하게 쓰는 글들이 동아일보에 실리는지는 의문이다.

내가 주성하 기자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미디어스 기자 시절인 2012년 6월의 일이다. 민주통합당 임수경 의원이 탈북자에 대해 ‘변절자’로 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파문이 일어난 상황에서, 6월 5일자 동아일보 1면에 파격적으로 배치된 주성하 기자의 ‘편지’ 형식의 기사를 통해 그를 알게 되었다.

여기서 주성하 기자를 동아일보가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하나는 노선상의 문제다. 동아일보의 바람과 주성하 기자의 생각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을 거라 추론할 수 있다.

2012년 6월 5일자 1면에 실린 편지 내용에서도 그랬다. 주성하 기자는 물론 임수경의 인식에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임수경 의원이 북한에 방북한다면 북한 체제의 선전선동에 통렬한 타격이 될 거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그걸 막을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반면 동아일보라면 임수경 의원의 방북 요청 자체에 비판적이었을 것이고, 정부가 그것을 허가했다면 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형식의 문제다. 주성하 기자는 북한 체제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시민이 된 탈북자 출신이고, 북한에 대한 나름의 취재소스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가 전달해주는 얘기는 신빙성이 상당히 높다(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취재원을 최대한 숨겨야 하기에 사실과 해석을 자유로이 오가면서 자신의 생각까지 섞어서 쓰는 경우가 많다.

비주류 인터넷 매체, 예를 들어 미디어스 같은 매체라면 그런 형식으로 쓰여진 모든 글이 자사 기사로 발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아일보에선 무리다. 동아일보가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라는 제목의 일종의 에세이 지면을 통으로 주고 있음에도 그렇다.

또 앞서 언급한 미묘한 노선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주성하 기자가 동아일보 지면에 실은 글에 대해선 완곡화법으로 지적된 것들이 많다고 느낀다. 그가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자기 글을 올리면서 몇 마디 덧붙인 말들이 훨씬 예리하고 핵심적인 경우들이 있다(사실 오늘 처음 소개한 글 역시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블로그 툴로 읽었고, 동아일보 게재 여부는 검색 이후에야 확인했다).

이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오늘날 뉴스 매체의 독자들은 사실 자체의 전달보다는 그에 대한 해설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의 흥행과 이에 영향을 받은 종합편성채널 정치토크쇼 등이 그 요구를 충족시켜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존 일간지의 문법은 이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심지어는 오해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내정된 정국에서 경향신문의 검증 기사가 그랬다. 2017년 5월 26일자 기사인 <[단독]김상조 공정위원장 후보자도 2차례 위장전입>였다.

정권 초 나온 이 기사에 대해, 당시 한참 진보언론에 각을 세우던 문재인 지지자들은 “역시 ‘한경오’가 문재인 정부를 흔들려고 한다”라며 반응했다.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다. 경향신문이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바랄 리도 없거니와, 더군다나 김상조 위원장과는 매우 돈독한 관계다. 김상조는 경향신문에서 수 년 간이나 경제시평을 연재한 바 있다. 막상 보도를 본 후 당황하긴 했지만 경향신문이 기사를 쓰는 단계에서 김 위원장은 “매를 맞으려면 경향신문에게 맞는 것이 낫지”라며 경향신문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드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당 기사가 많은 비난을 받은 후 작성한 기자가 페이스북에 해명문을 올린 것을 본 적이 있다. 기자의 설명은, 이 기사에선 첫 번째 사례와 두 번째 사례가 매우 다르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첫 번째 주소 이전에 대한 김상조 위원장의 해명은 적절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두 번째 주소 이전에 대한 해명은 미심쩍은 데가 있었고, 자녀 교육을 위한 일반적인 위장전입의 양상이 보였기 때문에 기사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상조 위원장의 해명이 부실했다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김상조 위원장은 청문회 과정에서 아내의 암투병 이력을 굳이 말하기 싫어서 해명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위장전입 의혹’은 미담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경향신문 기사가 ‘오보’가 되지는 않는다. 쓰여진 시점에서 경향신문이 사실관계를 왜곡한 것은 없었다. 김상조 위원장이 이후 부실했던 해명을 보충했을 뿐이다. 그러한 상황을 이끌어낸 것 자체가 언론 기사의 순기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이 기사가 소비되는 방식은 언론 환경에 대한 고민을 가져왔다. 기자가 말한 두 개의 사례의 차이, 두 번째 사례에는 더 적절한 해명이 필요했다는 취지를 그 기사에서 읽어낼 수 있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사람들에겐 <[단독]김상조 공정위원장 후보자도 2차례 위장전입>이란 제목만이 남았다. 그리하여, 문재인 정부와 김상조 위원장의 지지자에겐 이 기사가 ‘오보’가 됐다. 사실 아내의 암투병 때문에 이사를 한 거라면 실거주지가 아니므로 애초에 위장전입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후 정부 비판자들은 ‘위장전입을 한 내로남불 김상조’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남은 것은 제목의 낙인효과 밖에 없었다.

몇 가지 질문이 도출된다. 중앙일간지는 위와 같은 기사 형식을 고수해야 할까? 만일 중앙일간지의 특성상 이를 고수해야 한다면, 다른 형태로 추가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방도는 없을까? 이를테면 요즘 많은 독자들이 SNS를 통해 뉴스를 소비한다면, SNS에서의 해설을 통해 이 간극을 메꿀 수는 없을까? 이 경우 ‘기사’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다른 사례가 있다. 정확히 어느 날짜의 기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비슷한 시기 한겨레는 기사 제목 편집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을 업수이 여긴다는 ‘오해’를 샀다.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은 어느 날 한겨레가 제목에서 박근혜는 “박 전 대통령”이라고 호칭하면서 다른 제목에선 문재인을 “文”이라고 호칭한 것을 발견했다.

진실은 이랬다. 당시 한겨레 지면 편집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면에 이미 등장했다. 1면에 “문재인 대통령”이란 제목이 나왔기 때문에 이후 지면에선 공간 제약 때문에 “文”이라고 적은 것이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이란 기사 제목은 그날 신문에서 박근혜가 처음으로 등장한 기사였다.

어쨌든 한겨레가 굳이 문재인 대통령을 업신여겨 그런 지면 편집을 할 리는 없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의 비판은 ‘오버’였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이와 같은 제목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은 매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물론 한겨레만의 문제는 아니다.

온라인에는 지면 제약이 없다. 종이신문 공간 제약 때문에 생긴 “文”이란 제목이 온라인기사 제목으로 유지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종이신문이 주이고 온라인 대응이 부라는 식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기사’라는 것이 다수의 매체에서 복수 실현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지면에 얹힐 때는 지면에 최적화된 형식으로, 온라인에 올라탈 때는 온라인에 최적화된 형식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사’가 몇 개의 매체에 복수 실현되고 그 과정에서 소개되는 방식까지가 편집부의 통제 아래에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마도 조직체계 자체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언론사에 너무 많은 것을 주문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체계적인 대응 없이 뉴미디어를 따라가려고 할 때엔 기자 개개인에게 너무 많은 요구가 주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오히려 조직체계 자체를 개편하면서 새로운 형식을 실험할 때 기자 개개인이 감당할 만한 영역 내에서 매체 변동에 대한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한국일보 등 몇몇 언론에선 그러한 실험이 시작된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한 대처의 속도와 방향의 적절성이 향후 언론들의 생존경쟁에 큰 변수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이제는 언론사 구성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들이 잠정적으로 ‘기사’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기자 개개인에게 뉴미디어 대응을 맡기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 ‘개인기’로 조회수를 낚아 오라 요구하고, 문제가 생길 경우 언론사가 사과해야 한다면 더 이상 효율적인 대응이라 보기 어렵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이 글에서 지적한 난점들을 더 많은 언론사 종사자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빠르게 고민하고 대처하는 이들이 뭔가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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