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하나, 평소 한량처럼 집안을 배회하던 심운택은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는 동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장희재의 등장에 당황하고 행수의 질책에 곤란해 하는 그녀를 도와줍니다. 우연 둘, 20여회동안 등장하지 않던 동이 오빠인 동주의 연인이었던 설희는 의주의 기방을 주름잡는 대모가 되어 결정적인 순간에 동이를 도와주고 심운택을 살려 줍니다. 우연 셋, 청나라의 세자 인증문제로 의주로 올라온 장희재는 동이의 소재를 알리려는 심운택의 상소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녀의 생존을 확인하고 또 다른 위기가 그녀에게 다가 옵니다.

또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따지고 보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가뜩이나 주위의 충고로 낭군님의 마음 변화를 의심하던 장희빈은 참 타이밍도 좋게 숙종이 품고 있던 동이의 꽃신을 발견합니다. 의주 행수가 장희재를 위해 고른 기방은 하필이면 설희가 운영하는 곳이었죠. 이렇게 까칠하게 따지다보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동이에서는 이들의 모든 만남, 모든 문제의 발생, 모든 사건의 해결이 전부 우연히 일어난 것만 같아요.

네. 우연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일들이 딱딱 정해진 계획대로, 논리적이고 합당한 이유에 맞춰 일어나는 것은 아닌 이상, 어느 정도의 예상치 못한 우연과 당황스러운 사건 사고가 끼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삶의 경험을 모두 공유하고 있는 이상, 드라마의 진행을 원활하게 도와주고 애매한 상황을 시청자들에게 납득시켜주기에는 우연만큼 좋은 도구도 없죠.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곤란한 상황이야말로 위기가 연달아서 일어나야만 하는 드라마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지금 동이는 이런 우연이란 도구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사고뭉치 커플로 연결된 동이와 심운택의 좌충우돌 의주 탐험기의 명맥을 이어주는 것은 오로지 우연일 뿐이에요. 모든 사건의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이 우연이라는 카드는 가뜩이나 점점 더 역사적인 사실에서 벗어나고 있고, 등장인물의 능력치가 과대 포장되고 있는 동이의 판타지를 더욱 심화시켜 줍니다. 두 사람의 무대책, 무계획의 돌진이 해결의 과정으로 가는 방식은 개인의 노력이나 기량, 논리적인 귀결이 아닌 우연이니까요.

그만큼 이야기 자체의 헐거움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당위, 반드시 그래야한 하는 큰 줄기인 장희빈의 몰락과 동이의 영조 엄마 되기라는 방향은 정해져 있지만 그 기초적인 역사적 사실을 파괴하며 상상의 세계로 나아가다보니 동이는 점점 슈퍼우먼이 되어 버렸지만 좌충우돌하며 사건을 만드는 습성은 버리질 못했고, 숙종은 달콤한 로맨티스트에서 이젠 용포보다는 사복이 더 잘 어울리는 무능력한 왕이 되어 버렸고, 장희빈은 악과 집착만이 남은 시시한 악녀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무너진 캐릭터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억지 우연들이 남발될 수밖에요.

동이의 우연이 필연이 되기 위해서 좀 더 정교하고 납득할만한 스토리 라인이 절실하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옥의 티가 난무하며 그 완성도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던 동이가 월화드라마의 선두를 차지하면서도 그 기세가 여전히 아쉬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요? 갈수록 단순하고 평범해지는 매력 없는 캐릭터들과 개연성도 설득력도 없는 상황들이 반복되는 판타지 드라마. 이병훈 PD의 저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이는 갈수록 그 힘이 확연하게 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드라마의 생명력은 그나마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장희빈의 몰락과 함께 급격하게 소멸해버릴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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