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동안 김여정이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지난 10일과 이후 상황의 맥락이 대략 정리되었다. 핵심은 북미대화가 가능할 것인지와 비핵화 의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맞춰지고 있는 것 같다.

김여정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김정은의 특사 자격으로 방남하였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의 지위로만 온 것이 아니라는 거다. 특사라고 하면 보통 그 지위를 지도자가 권위로 보증한 것으로 보고 이에 준하는 의전과 대우를 하기 마련이다. 눈길이 김여정의 행보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

김여정은 문재인 대통령 초청 의사를 밝히며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였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고 답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이를 남북정상회담 수락의 의미로 설명하였으나 곧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이 나와 기자들에게 “워딩 그대로” 이해해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남북정상회담 및 방북 초청 수락 여부가 현 시점에서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게 여기서도 드러난다.

‘여건’이란 결국 국제사회, 특히 미국 문제를 염두에 둔 표현이었을 것이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방한 일정 내내 ‘반북캠페인’을 지속하며 강경한 행보를 이어갔다. 9일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리셉션 만찬장에 나타났다가 5분 만에 퇴장해버린 것은 이런 행보의 화룡점정이었다. 펜스 부통령의 태도에 대해선 ‘결례’ 논란도 있는 모양인데, 청와대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 역시 어느 정도 해프닝의 성격이 있는 듯하다.

분명한 것은 미국이 “모든 옵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는 표현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펜스 부통령의 행보가 주목받는 상태지만 “일단 만나서 날씨 얘기라도 하자”던 미국 내의 이른바 온건파들이 갑자기 다 없어져 버린 것도 아니다. 대화 국면에서 이전까지의 매파적 행보는 협상력으로 축적될 것이다.

미국이 실제로는 대화를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 거짓으로 강경파를 연기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할 것이라는 걸 상대에게 정말로 믿게 만들려면 실제로 그 일을 해버리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이른바 ‘미치광이 전략’이다. 현재 트럼프 미 행정부가 대외정책을 다루는 태도가 이런 식이다. ‘코피작전’을 언급하며 대북군사옵션이 더 이상 엄포가 아닌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수틀리면 실제 힘에 의한 북핵문제의 해결을 추진하겠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바로 그 다음 날에라도 대화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는 게 지금 미국의 태도이다.

북한은 ‘미치광이 전략’이라는 분야에선 독보적 위치를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이를 진지하게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빠져있다. 건군절 열병식 규모를 축소하면서도 ICBM급 미사일 공개를 강행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고 봐야 한다. 북한이 완전히 머리를 숙이지 않았기 때문에 펜스 부통령은 더 강경한 행보를 할 수 있었다. 일종의 악순환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10일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여자 예선전을 관람하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한반도 문제의 운전대를 잡는다는 문재인 정권이 중간에서 상황을 조율해야 한다. 남북이 허울뿐인 정상회담을 진행해봐야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북핵문제는 결국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전제는 북미 간에 대화 국면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양측이 명시적으로 무언가에 합의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대화가 이뤄진다는 사실이 분명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여정을 포함한 북한 고위급 대표단에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북미 간에 조기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이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북미대화가 가능한 조건은 무엇인가. 언론은 목적이 비핵화에 있을 때에만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경우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비핵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대북압박을 풀 수 없다는 견해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김여정의 방남은 일종의 속임수라고 생각한다는 발언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보면 언론의 분석이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데 미국의 이런 태도에 일종의 함정(?)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예를 들면 남한이 양측 사이에서 중재를 선다는 전제가 있다면 미국이 ‘코피작전’을 언급하고 해상차단을 모색하는 등 압박을 지속하다가 대화 테이블에 끼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는 북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비핵화를 전제한다는 것의 실제 내용이 무엇이며 북미대화 또는 북미접촉이란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이뤄져야 하는가를 놓고 여러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이렇게 보면 평창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넓은 의미의 대화국면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제는 무엇과 무엇을 맞바꾸느냐가 문제이다. 예를 들면 한미연합군사훈련 문제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이 끝나기 전까지 북한과 미국이 유의미한 접촉을 실시해 이후 필연적으로 예정된 긴장국면을 관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의 핵미사일 추가 실험 중단과 한미군사훈련의 축소 내지는 추가 연기 등이 교환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이 경우의 수가 나올 확률은 크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한미군사훈련 재개가 유력하고 북한이 도발로 이에 맞설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다. 다만 완전히 판을 깨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한미군사훈련의 경우 전략자산 참가 범위의 축소 가능성을 예상해볼 수 있다. 이 경우 북한은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숨을 죽이고 있거나 아니면 저강도로 평가되는 수준에서 미사일 발사 등의 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

판이 완전히 깨지지 않는 최소한의 조건만 유지된다면 문재인 정권은 대북특사를 파견하는 일정을 통해 양자 사이에서 일종의 ‘쿠션’ 역할을 자처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연내에 유의미한 수준에서 북미접촉이 가능한 조건이 마련될 수 있다면 문재인 정권으로선 다소 숨이 트인다.

그러나 이후에도 양측에서 상황의 진전이 없다면 그때는 ‘결단’을 해야 할 순간이 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신년 기자회견에서 “회담을 위한 회담이 목표일 수는 없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 순간의 결단이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내에 남북관계의 진전을 볼 수 있느냐를 최종적으로 판가름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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