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평창동계올림픽 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은 그야말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여있다. 핵심은 남북관계의 진전이 북미대화로 이어질 수 있느냐인데 상황에 진전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낙관할 수 없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8일 창군 70주년 기념 열병식을 강행했다. 외신을 초청하지 않은 채 비공개로 진행했고 행사 시간도 줄이는 등 규모의 축소가 있긴 했지만 화성 14호, 15호 등의 전략무기를 꺼내 미국에 대한 위협을 포기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언론은 이를 두고 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을 활용한 남북관계 개선에 대해서는 나름의 성의표시를 했지만 북미대화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 이중적 행보를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관점을 좀 달리해서 볼 필요도 있다. 오히려 여전히 방점은 남북관계가 아니라 북미관계에 찍혀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다고 평가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일종의 협상카드이다. ICBM 능력을 제한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반대급부로 현재 핵무장 상태의 유지를 요구하는 게 북한의 기본 전략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번 열병식에 ICBM이 나온 것은 미국과 거리를 두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화 테이블을 만들기 위한 ‘재촉’에 가까운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물론 대화를 위해서는 열병식에 ICBM이 나오는 것보다는 나오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국의 행보이다. 평창동계올림픽 일정 참석을 위해 8일 방한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일정의 상당 부분을 대북 압박을 위한 행보에 집중하고 있다. 북한에 의해 폭침당한 천안함을 직접 보러 간다고 하고 탈북자들과의 간담회도 진행하겠다고 한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대북 압박을 위한 공동행보를 하겠다는 의사를 계속 강조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런 기조는 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 국면전환 의사를 분명히 하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방남을 공식화한 상태에서도 흔들림 없이 계속됐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미국에 상당히 기울어진 상태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보다는 마찬가지로 강경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일종의 레버리지 확보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대화의 공간이 열린다면 이의 성사를 위해 자원을 더 소비한 쪽이 불리해지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조선중앙TV가 8일 오후 녹화 중계한 '건군절'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이동식발사차량(TEL)에 실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가 등장했다. (연합뉴스)

미국과 북한이 서로 몸값을 올리는 상황에서는 알아서 대화 국면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남한 정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으로서는 북미대화를 주선하기 위해 직접 판을 만들고, 버티는 양쪽을 억지로 테이블에 불러다 앉히고, 대화를 위한 의제를 제시하는 복잡한 임무를 모두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다. 여러 차례 지적했듯 이를 통해 남한 정부만을 위한 실리를 얻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동아시아 전체의 군사적 긴장도를 낮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해볼 만한 게임이다.

대다수 언론은 북한이 김여정 파견 카드를 통해 남북정상회담 국면을 열고 이를 빌미로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연기, 축소, 중단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여정과 10일 접견할 예정인데 이 자리에서 김정은의 메시지가 어떤 형태로든 전달될 것이라는 게 대다수 언론과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이 메시지에는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난 이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자는 내용이 포함 될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정부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카드이다.

보수언론은 이렇게 될 경우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공조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사실상 남북관계를 북한이 주도하는 국면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한 결과가 북한의 핵능력 유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보수언론이 제기하는 문제 중 하나이다. 북미대화가 이뤄지더라도 ICBM능력을 제한하는 선에서 1차적 협상 타결이 이뤄진다면 우리는 앞으로 “머리에 핵을 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언론은 이러한 주장을 상당히 악의적인 방식으로 제기하고 있지만, 사실만 놓고 보면 우려할 수도 있는 대목인 것은 사실이다. 또 이런 국면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이 과연 북미대화의 테이블을 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비핵화 요구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과의 회담에서 “우리로서는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북한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고 발언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펜스 부통령의 회담은 대화냐 압박이냐의 방법론적 차이가 부각된 것처럼 보이지만 비핵화가 최종 목표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문재인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8일 오후 청와대에서 만나 얘기 도중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기간 때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대화의 최종 목표는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해왔다. 구체적으로는 대화의 입구가 핵동결이고 출구는 비핵화라는 주장이다. 북한의 핵을 당장 없앨 수는 없지만 비핵화를 장기적 과제로 설정하고 테이블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 구상이 실현되려면 북한도 비핵화가 불가능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 어떤 뉘앙스를 줘야 한다. 북한의 기존 입장은 비핵화를 위한 회담이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 한 핵군축 및 평화회담을 제기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핵을 포기하는 그림이 아니라 적어도 핵을 평화협정 및 북미수교와 맞바꾸는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 원하는 최대치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양쪽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 간극을 좁히고 타협점을 찾기 위한 절차가 바로 대화와 협상이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적어도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는 조건 형성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협상의 최종 결과를 한반도 평화협정이라는 형태로 도출해내겠다는 의지를 수차례 밝힌 바 있다.

물론 ‘한반도 평화협정’이라는 개념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는 아직 유동적이다. 그러나 적어도 북한이 ‘대화의 출구는 비핵화’라는 점에 기본적인 동의 의사를 밝혀야 대화 테이블이 열린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북미대화가 열릴 가능성은 남한과 미국의 행보에만이 아니라 북한의 선택에도 달린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중에 이 점이 분명히 돼야 상황의 진전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북한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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