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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한국의 외교 위기, 오천년 역사에서 생존전략을 찾다[블로그와] 톺아보기
meditator | 승인 2018.02.08 20:01

결정론을 피하고 싶지만, 한 나라에 있어 지정학적 위치는 운명적이다. 특히나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세계의 제국이라 자처하는 미국과, 또 다른 바다 황해, 심지어 날이 좋으면 육안으로도 마주할 수 있는 신흥강국 중국 사이에 위치. 그리고 북으로 한민족이라 하지만 동상이몽 북한과 남보다 못한 이웃 일본 사이에 끼인 대한민국의 운명은 언제나 그 자신보다도 외적 동인에 의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교육을 통해 배워온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은 현실보다는 '민족적 대의'에 맞춰 편제된 역사였다. 몽고에 대항한 고려의 대응은 '삼별초의 결사 항전'이었고, 조선 말기 고종대에 겪은 외세의 침탈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등. 1월 29일부터 5부작으로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은 그런 기존의 역사에서 한 발 비껴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지나간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투키디데스에 빠진 한국 

EBS 다큐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편

무엇보다 이런 '현실주의적 역사학'의 필요를 바로 지금 시점, 외교적 위기에 봉착한 한반도 정세에서 길어 올린다.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 아테네와 스파르타 전쟁에서 유래된 이 용어는 기존 패권 국가와 신흥 강대국이 부딪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리고 최근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고 있는 미국과 그런 미국을 상대하며 자국의 패권을 확장시켜 나가는 중국,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러시아, 일본 사이에 낀 대한민국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용어다.

하지만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우리 역사에서 그리 생소한 상황이 아니다. 일찍이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는 늘 위기와 선택의 함정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당과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던 고구려, 그리고 일본까지 그 영향력을 뻗친 백제 사이에 끼인 신라의 풍전등화 운명이 그러했고, 남하정책을 벌이며 성장해 가는 거란과 국경선을 맞닿은 고려가 그랬고, 폭풍 성장하는 강국 몽골을 상대한 후기의 고려가 또한 그러했다. 명청교체기에 갈피를 잡지 못한 병자호란 시기의 조선이 다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한반도를 판으로 이권쟁투를 벌였던 개항기의 조선이 그러했다.

다큐는 바로 이런 위기의 한국사를 '반면교사'로 오늘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그 첫 장을 연 건 김춘추의 신라이다. 624년 백제의 대야성 공격으로, 그리고 내부 정치의 혼란으로 위기에 빠진 신라. 그 위기를 당시의 리더 김춘추는 고려와의 외교적 연대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당시의 적국이었던 고려로 솔선수범하여 찾아갔지만 결과는 실패, 그 자신이 억류되었다 가까스로 목숨만 건진 채 도망친다.

EBS 다큐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편

하지만 다큐는 국가적 위기에 빠진 리더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구하기 위해 타 국가와의 적극적 해결을 나선 점을 높이 평가한다. 고려에서 실패한 김춘추는 당시 고려와의 경쟁에서 고전하고 있는 당을 차선의 해결책으로 택한다. 늘 육전으로 고전했던 당은 이에 적극적으로 신라와 제휴하여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 정벌까지 하며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견인차가 된다.

물론 신라의 삼국통일 그 자체는 최근 재야 역사학계의 문제제기와 함께 이론의 여지가 있다. 백제 왕국과 거대한 고구려의 제국 그 영토의 상당수를 잃은, 그리고 통일신라 내내 백제 영토 내에서 있었던 부흥운동 등으로 인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재론의 여지는 남는다.

그러나 다큐는 가만히 있었다면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으로 국가적 존망이 위태로웠을 신라가 그 위기를 역으로 활용,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으로 오히려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거듭난 실리주의적 방식을 높이 산다. 뿐만 아니라, 백제를 패하고 이어 고구려까지 정벌하러 나선 당과의 관계에서 김유신이 이른바 오늘날로 치면 '군사작전권'이라 할 수 있는 장수 김문영에 대한 보호는 제휴는 하되, 자국의 패권을 놓치지 않는 성공적 사례로 기록한다.

첫 회 신라의 사례를 통해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지정학적 위치 상 열강 사이에서 고립되기 쉬운 한반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리적 외교 정책이며, 그 실리적 외교정책을 뒷받침하는 건 바로 '자강'의 국력이라는 것이다.

실리적 외교와 자강의 국력, 그 두 마리의 토끼 

EBS 다큐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편

그 첫 외교적 실리의 사례는 이미 우리도 역사적으로 잘 알고 있는 서희의 외교적 승리이다. 하지만 고려가 처음부터 현실주의적이었던 아니다. 당시 남하 정책을 펼치고 있던 거란이 고려와의 유대를 위해 사신을 보냈을 때, 발해를 패망시키고 들어선 거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고려는 사신을 죽였다. 그 결과는 거란의 침공.

하지만 남하 정책에 발목이 잡힌 거란의 속내를 읽은 서희가 나서 오히려 강동 6주을 얻는 혁혁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에 이른다. 명분보다 실리를 앞세운 전형적인 외교전의 승리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 이후이다. 서희는 그런 외교전에서 얻은 강동 6주 등 압록강 국경선을 구축하기 위해 과로사 할 정도로 고려는 이후의 대비에 충실했다. 그럼에도 20년 뒤 거란은 다시 침입을 강행했는데, 이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감찬의 살수대첩으로 고려는 거란을 성공적으로 물리친다. 하지만 여기서 다큐가 주목하는 건 바로, 당시 현종이 수도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앞서 나아가 방어선을 쌓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EBS 다큐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편

이 '방어선'은 몽골 침략 시 강화도 천도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고립과 대비된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강화도로 옮기려 했으나 그조차 시간이 여의치 않아 피난처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남한산성으로 옮긴 것이다. 그렇다면 수도를 포기하지 않고 앞서 나아가 방어선을 쌓는 것과 강화도로의 천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몽골이 침략해 왔지만 혹시나 군대가 다시 자신들처럼 쿠데타를 일으킬까 두려운 무신정권은 군대를 내보내는 대신 수도만 강화도로 옮겼다. 수운을 이용하여 세금을 걷을 수 있고, 그 덕택에 왕과 귀족들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국토는 몽골에게 유린당했다. 바로 이 리더의 자세 차이이다. 그래서 병자호란 당시에도 앞서 방어선을 치면 설사 패배하더라도 온 나라가 짓밟히지는 않는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하지만 몽골의 무신 정권도, 병자호란 당시 인조도 그런 건 염두에 없었다.

다큐는 바로 그 지점에서 리더의 자세를 논한다. 오늘날 우리가 기리고 있는 '헤이그 밀사', 그 이면에는 한 국가의 대표로서 나라를 지키기보다는 외세의 힘을 빌려 자신의 왕권을 보존하려 했던, 고종의 지극히 타산적인 외교 정책이 있다고 다큐는 논박한다. 외교적 '균형자'도 자국의 기반이 우선되어야 가능하다는 당연한 결론 앞에 일본의 힘을 빌려, 그게 안 되면 러시아의 힘을 빌려, 또 그게 안 되면 미국에 읍소하고 유럽 열강에 기대려 했던 고종에게 '망국'은 예정된 결과라 다큐는 짚는다.

EBS 다큐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편

각국의 석학과 국내 유수한 역사학자들의 입을 통해 다큐는 말한다. '세계 10위의 경제 강국 한국. 만약 한국이 아프리카나 유럽, 심지어 다른 아시아 지역에 있었더라면 한국은 지역적 패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한국의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의 미래를 위태롭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다큐는 오천 년 한국사의 사례를 냉철하게 제시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외교적 관점을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그 외교적 선택에 '자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이른바 '국뽕'을 배제한 한국사이다. 아니 어쩌면 이제 진짜 한국사인데, 우리는 여태 색안경을 쓰고 역사를 봐왔는지도 모르겠다. 새롭지 않은데, 그래서 또 새로웠던 역사 이야기이다. 특히, 현실주의적 외교와 그를 뒷받침한 자강정책 강조도 그렇지만,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바라보는 청과 관련하여 우리 안의 중심과 타자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제기는 의미 있었다. 오늘날 제국 미국과 여전히 우리에겐 '떼놈'인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원론적인 '반면교사'라는 점에서 더더욱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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