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에 다시 기고하게 되면서 한 번쯤 간략하게라도 정리해봐야지 했던 주제였다. 매체비평지라는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현직 기자라면 쓰기가 좀 민망한 주제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기레기’라고 부를까. 사소한 것들부터 심각한 것들 순으로 정리하면서 실상을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첫 번째 접근: 맞춤법 지적 등 능력을 문제 삼는 경우

한국의 온라인에는 무급 교정·교열자들이 많다. 매체의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나 이들의 활동이 순수한 자선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보다보면 아직도 일각에선 전문직이란 환상을 유지하는(현실은 천차만별이지만) 기자 집단에 대한 본인의 우월의식을 발산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말하자면 저치보다 내가 맞춤법에 능숙하니 사회의 선별과정은 뭔가 문제가 있고 실은 내가 더 능력이 좋고 쓸모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광고하는 식이다. 꼭 맞춤법이 아니더라도, 매우 사소한 사실관계나 표기법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지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을 그런 방식으로 쓰면서 자존감을 충전하는 것도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간의 경험으로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엔 그런 이의 비중이 다른 사회보다 좀 더 많다는 느낌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쓸모’와 ‘능력’이란 잣대로 구성원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곳임을 보여주는 것일 게다. 큰 틀에서 보면 문과와 이과의 상호 비난 내지는 자학, 대학원생과 회사원의 그것과 비슷한 유형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의 실수’가 줄어들 것 같지 않다는 데에 있다. 등록된 매체의 숫자만 삼천 개가 넘고 그들이 모두 조회수 경쟁에 몰두한 상황에서 그러한 실수가 줄어들기는 어렵다. 심한 경우 한 시간에 열 개씩 기사를 토해내는 곳에서, 기자의 역량과 데스크의 관리를 주문하기도 민망한 상황이 발생한다. 인터넷엔 넘치는 교정·교열자들이 정작 매체 내부에는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문제는 결국 ‘기사 작성 AI’가 개발되고, 상용화된 그 서비스의 가격이 매체 입장에서 인원의 노동력을 뽑아먹는 것보다 저렴해질 때에야 해결될는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 게티이미지

두 번째 접근: 익명의 관계자로 소설을 쓴다

한국 언론에 유난히도 ‘익명의 관계자’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한국 언론이 함량미달이며, 취재없이 막 쓰는 거짓말쟁이라는 근거로 드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한국 언론에 익명 관계자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는 사실인 것 같다.

미디어스 재직 시절 이 문제로 취재를 해본 적이 있었는데, 기자들은 한국 사회는 워낙에 풀이 좁고 서로가 서로를 다 알기 때문에 익명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취재도 불가능하고 기사도 쓸 수 없는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사실 비슷한 경험을 해본 입장에서 그 항변에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조직 내 이견이나 상사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못하는 문화도 당연히 이 문제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다보니 생기는 문제는 얼핏 봐서는 이 사람이 성실하게 취재했는지 아니면 ‘뇌내망상’을 지껄이고 있는지를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독자의 입장에서는 더 그렇다. 한 영역에서 익명의 취재원을 동원한 상반된 주장을 담은 기사가 나올 때, 이중 뭐가 진실에 가까운지를 가리기는 어렵다.

그런데 둘 다 거짓 기사가 아닐 수도 있다. 한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사건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도 있고, 대립하는 양측이 ‘언론 플레이’를 하는 것도 기본 중에 기본이니 말이다.

보통 출입처가 같은 기자들끼리는 누구 것이 더 성실한 기사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사의 문법에 익숙해지면 출입처가 아니라도 그게 어느 정도 눈에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느낌이 사실이냐고 물으면 그게 또 대답이 어렵다.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겐 ‘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는 느낌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여러분이 더 기사를 열심히 읽으세요’라고 약을 팔기엔 어려운 시대라는 것이다.

1> ‘취재원의 평가’와 2> ‘동료 기자의 평가’와 3> ‘독자의 평가’가 각각 제각각인 것이 기자라는 직종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 과거엔 그래도 3>이 다소 동떨어져 있었고 1>과 2>는 같이 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요즘은 1>이 3>에 가까워져간다. 취재원도 결국은 여론의 힘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자라는 직능의 성취감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자들이 높게 평가하는 기자는 정작 일반인들은 모르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잘 접근해서 뭘 캐내기보다는 ‘소설’이나 ‘그림’ 그리는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개인에게도 매체에게도 더 나은 일일 수가 있다는 딜레마가 생긴다.

인터넷 시대에 조회수를 추구해야 하고 기사 건수도 늘어났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친다. 한 사안에 대해 한 건만 쓸 수 있다면 본인이 파악한 바 사실에 가까운 식으로 기술하겠지만, 네다섯 건을 써야 한다면 그렇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여러 방면으로 바라보고 기술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독자 입장에선 ‘쓸모없는 정보’이거나 ‘소설’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는 잡정보’가 되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세 번째 접근: 갑질을 한다

이것도 ‘기레기’라는 규정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솔직히 말하면 들을 때마다 약간 웃음이 나기도 한다. 보통 일반인들이 ‘기자의 갑질’을 경험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매체비평지 기자에겐 그 경험이 조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속성에 대한 경험담에는 오프라인 경험담은 거의 없다. 매체나 기자가 자신들에 대한 반박을 무시했다거나, 혹은 반박에 징벌적 기사(독자들이 보기엔)로 응답했다거나, 기자의 온라인상 반응이 독자에게 적대적이었다는 식이다.

기자들은 본인이 파악한 방향대로 뚝심 있게 나아가는 것을 ‘곤조’(원래는 ‘근성’의 일본식 발음이지만 한국에선 ‘근성’과 좀 다른 의미영역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요즘은 그런 태도조차 독자들에겐 ‘갑질’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방향의 비판을 보다보면, 독자들이 원하는 매체와 기자는 자신의 독자층의 심기를 잘 살피고 나긋나긋하게 굴어야 하는 서비스업체 및 그 직원과도 같다. 보통 그런 광경을 볼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친절을 요구하는 그 고객이 ‘갑질’을 한다고 표현한다. 뭔가 물구나무서 있다는 느낌이다.

참고로 기자사회에서의 직능 자부심을 본다면, 큰 조직의 공채기수일수록 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연봉도 영향을 미치지만 아주 결정적인 요소는 아닌 듯하다. 웹 매체 기자라면 중소기업 직장인일 뿐이라, 그 월급 받으면서 상사 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욕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지극히 억울해 보인다(물론 대부분의 경우 독자들이 그들의 존재감을 느낄 일은 잘 없다). ‘기자’라는 명칭 안에 너무 천차만별의 환경이 묶이는 상황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한다.

네 번째 접근: 정파성으로 사태를 왜곡한다

이 부분이 가장 큰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요소들의 결합이면서 확장이기도 하기 때문에 순서를 이렇게 구성했다.

신문에는 물론 정파성이 있으며, 의도든 관성이든 그것으로 사태를 왜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파성이란 건 세밀하지가 않다. 매체도 기자도 마찬가지다. 대략 자유한국당계 정당에 우호적이거나 민주당계 정당에 우호적이거나 그보다 더 왼쪽인 좌파이거나 이런 식으로 구성되지 그보다 더 세밀하지 않다.

덜 예민한 연예계 예시로 들어본다면 이렇다. 이를테면 특정 기자가 울림 엔터테인먼트에 친화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러블리즈나 인피니트 중 누가 더 잘 나가는지에 대해 무슨 이해관계를 가지겠는가. 그런 건 팬덤에서나 관심을 가질 뿐이다.

물론 정치계에서도 연예계에서도 특정 팬덤 소속이던 이가 기자가 되는 일도 생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업무의 문제가 되면 그걸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다.

더구나 대부분의 기사는 그 성향과 무관한 것들이다. 매체비평지 기사로서 취재할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우리 데스크는 생각이 없어요”였다. 자조가 섞여 있는 말이긴 하지만 사태의 일단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특정 편집, 사진 선정, 특정 문구를 통해 무슨 의도를 실현하려고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보통은 맞지 않다. 그렇게 모든 것을 고민하고 산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뇌가 과열로 터져버리고 말 것이다. 데스크나 기자가 자신의 성향을 발휘하는 것은 매우 한정된 영역이며, 의견이나 관점의 영역인지라 눈에 잘 보이고 비평도 가능하다.

마지막 접근: ‘가르치려고 든다’?

이 모든 설명에 대해, 혹은 매체나 기사의 활동에 대해 ‘가르치려고 든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근본부터 따지자면 기자라는 직업은 가르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말다. ‘설명하기’보다는 ‘보여주기’를 추구하는 것이 매체다. 설명할 때도 독자를 공부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공부 안 한 독자에게도 이해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나 같은 사람이 적응을 잘못했던 “중학생도 이해하도록 써야 한다”는 격언 등이 의미하는 것도 그것일 게다(나는 보통 ‘…중학생 독해력도 천차만별인데요?’라고 답하곤 했다).

저 ‘가르치려고 든다’는 발언은 보통 엉뚱한 문맥에서 나왔다. 특정 상황에서 매체와 기자를 규탄하며 ‘기레기’ 운운할 때 그런 식의 잘못을 범한 것은 아니라는 배경과 맥락을 설명하면 ‘가르치려고 든다’고들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누군가 당신이 일하는 회사, 혹은 그 업종에 대해 무성의하게 세상을 좀먹는 일이라고 비난하는데 사실관계가 맞지 않다면 뭐가 됐든 항변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 항변에 대해 “그래도 또 가르치려고 드냐? 결국 너희들이 더 잘났다는 거냐?”라고 답하면 어찌 할 것인가. 무언가를 같이 논할 방도가 없다. 무슨 말을 하든 또 저 반응이 나올 것이니 말이다.

이런 의문을 표하면 ‘매체는 독자들의 지지로 살아가므로 독자들에게 공손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 그런데 공손하다는 것은 사실관계에 맞지 않는 논거로 형성된 뒤틀린 심기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더구나 앞의 말은 주로 스포츠선수들에게 요구되는 모종의 윤리의식과 흡사해 보이는데, 스포츠선수들도 사고를 치면 폭풍처럼 까이지만 적어도 직능 자체가 매도당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오늘날의 독자는 정치세력 및 정치인을 스포츠구단 및 선수로, 매체 및 기자는 응원단 및 구성원으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본분’에서 벗어난다고 비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레기’를 그만 놓아주자

그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흔히 독자들은 매체 환경이 변화되었고, 독자들은 똑똑해졌고, 매체와 기자들의 우위는 사라졌는데도 기자들이 여전히 철지난 잘난 척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변화된 매체 환경이 뇌를 쇠퇴시키고 있단 논의도 있지만 그와 별개로 여러 정보를 취합하고 판단내리기가 쉬운 환경이 도래한 것은 사실이다.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것을 취사선택하여 음모론에 쉬이 빠지지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람도 많다. 매체의 우위가 사라진 것도 맞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 사라졌는데 왜 여전히 그들을 격렬하게 미워해야 하냐는 것이다. 혹은, 왜 여전히 시민들은 그들과 동등한 책임을 지려 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바 오늘날 페이스북 파워 유저 등 각 매체에 숙달한 이들의 정치적·담론적 영향력은 기자 일개인보다 아득하게 높다. 다만 그 활동이 자신의 생업과 관련이 없을 뿐이다.

이제 ‘정보 왜곡’은 언론매체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것이다. 조중동을 집에서 받아보는 것으로 소일하는 노년층을 제외하곤 누구도 언론사 편집대로 기사를 읽지 않는다. 자신의 타임라인은 자신이 구성한다. 그것을 왜곡하려는 ‘작전세력’엔 모든 동료시민이 포함된다.

언론을 ‘가짜뉴스’를 생산한다고 욕해야 한다면, 그 욕의 논거들에 ‘가짜’가 섞여 있는지 여부는 궁금해지지 않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잘난 척을 할 때만 ‘기자보다 세상을 잘 이해하고 이끌어가는 나님’이 되었다가 책임을 물으면 ‘너희 기자님들과는 달리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무지랭이’가 된다. 반박을 당해도 ‘닉세탁’하고 다시 나타나 똑같은 소리를 한다.

차후에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대처해 나가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점점 더 사람들은 동료 시민들의 발언에도 그 영향력 여하에 따라 과거 언론에 요구하던 종류의 책임성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이가 미디어가 될 수 있다 광고하는 세상에서, 미디어 실천의 경험이 쌓이면 거기서도 옥석을 가려낼 대책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사실 걸핏하면 집단 뒤에 ‘XX충’을 붙이는 사회에서, ‘기레기’란 말도 별스런 욕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세상을 통제하기에 타격해야 한다는 모순적 언술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갈 거라고 생각한다. 기자 집단 역시 이러한 시대, 다른 나라보다도 어려운 매체 환경 속에서 어떤 식으로 직능의 자부심을 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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