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솔직히 저는 전 세계의 축제라는 월드컵이 이번 주 토요일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습니다. TV 광고는 이미 예전부터 월드컵 특수에 편승하려는 포맷들로 넘실거렸고, 방송사들 역시도 작은 연관점이라도 어떻게든 부각시키려는 특집들을 편성하고는 있지만 제 눈에는 이번 남아공 월드컵의 열기는 갑자기 더워진 요즘 날씨만도 못한 것 같아요. 그것이 단독 중계권을 따낸 SBS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타방송사들의 다소 소극적인 태도 때문인지, 너무나 머나먼 곳에서 열리는 탓에 직접적인 경험을 만들 수 없는 거리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막상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시작되면 대한민국은 또 다시 축제의 장으로 변하겠지만 그 이전의 분위기는 확실히 고요하기만 해요.

뭐 그래도 설레는 기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 같은 얼치기 축구팬에게도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의 경기를 이렇게 단시간 내에 몰아서 볼 수 있는 경험은,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외치며 하나가 되는 감동을 체험하는 것은 4년에 한번만 허락되는 축복이니까요. 국가대표 23인의 명단을 살펴보며 각 상대국과 맞설 나름의 베스트 11을 짜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서로 목청을 높여가며 경기 결과를 내기하는 것도 월드컵 시즌에나 할 수 있는 호사이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아니 더더욱 고조시키기 위해서 방송국들은 서로 앞다투어가며 TV 프로그램을 서서히 붉은 색으로 물들이는 바로 이런 잔치판을 준비하기 위한 군불 때우기에 들어갔습니다. 연예인들의 응원 메시지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각종 축하공연, 과거 경기 영상 편집, 선수들의 인터뷰와 과거담 회고 등등의 익숙한 포맷들이 넘쳐나고 있죠. 비록 한번 보면 그 전개와 결과가 뻔히 보이는 얄팍한 구성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상하지만 익숙한 프로그램들이야말로 추석의 성룡 영화처럼 월드컵 기분을 내게 해주는 장치인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들 월드컵 특집 프로그램들의 방점은 여전히 2002년에 확연하게 쏠려 있습니다. 반복해서 보여주는 경기 하이라이트, 광고에 출연하는 주요 국가대표 선수들, 화제를 이끌어내는 이야기 소재들은 모두 4강 신화를 이루어냈던 한일 월드컵에서 뽑아져 나온 것들이죠. 마치 지금이 2002년 바로 다음 월드컵인 것인 마냥, 2006년 독일에서의 기억을 언급하거나 이야기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어요. 마치 서로가 입을 맞추고 짠 것처럼 모든 특집 프로그램에는 이런 괴이한 시간상의 공백이 존재합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붉은 악마의 함성, 월드컵 열기의 출발점이 바로 2002년이었고 월드컵이라는 단어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모두 그 시간에서부터 시작했으니까요.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순간을 상기하며 또 한 번의 동참을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쉽고도 효율적인, 그리고 안전한 전략일 겁니다. 실제 방송에서 활용할 수 있는 선수들 역시도 4년 전 독일에 이어 이번에도 남아공행 비행기에 승선한 이들보다는 이젠 현역에서 물러나 제2의 인생을 기획하고 있는 2002년의 용사들이 대다수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진정 우리가 좋은 결과, 바람직한 접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돌아봐야 할 시간은 2002년의 예외적인 성공이 아닌 2006년의 의미 있는 경험입니다. 물도 공기도 우리 편이었던 홈어드벤티지의 장점, 다른 팀들과 확연하게 차이가 났던 기나긴 준비기간, 손쉽게 직접적으로 그 열기를 체험할 수 있었던 한일월드컵은 우리가 만나게 될 남아공에서의 시간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라리 낮선 외국의 환경에서 고군분투하고,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며 성원해야 할 우리에겐 이번 월드컵은 2006년의 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을 것이에요.

게다가 16강 실패라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 안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은 좌절의 시간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우리 선수들을 좀 더 알고, 좀 더 이해하며 응원할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4년 전의 선수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국가대표팀이 얼마나 새로운 얼굴들과 함께 우리 앞에 등장했는지를 알기 위한 출발점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4년 전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독일 땅에서 태극마크에 부끄럽지 않게 뛰었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당연한 접근법을 지금 TV에서는 볼 수 없어요. 여전히 화면은 어퍼컷을 날리는 히딩크의 모습이 가득하고, 붉은 물결로 넘실거리던 경기장 전경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과거를 팔아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젠 좀 지겨울 정도에요.

좋았던 시절만을 기억해서는 아무런 발전도, 의미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전 프랑스 TV에서 지단을 월드컵의 지배자라고 호칭하던 장면을 보며 프랑스 친구가 우리가 우승한지가 언제인데, 그 단한번의 우승으로 지배자라는 칭찬을 아직까지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웃던 기억이 나더군요. 지금 우리의 모습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추억은 그 나름대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지만, 아프고 아쉬웠던 기억까지도 품을 수 있어야 그 영광의 시간이 빛나는 법 아니겠어요? 사라져버린 2006년의 기억에 대한 태도가 안타까운 이유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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