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김의겸 한겨레 전 선임기자가 청와대 신임 대변인으로 내정됐다. 김의겸 대변인은 2016년 겨울을 뜨겁게 만들었던 장본인 중 한 사람이었다. TV조선과 JTBC와 한겨레가 위험을 무릅쓰고 주도했던 저 숨 가쁜 ‘최순실 게이트’ 정국에서 한겨레의 취재를 진두지휘했다. TV조선 이진동팀의 취재망이 훑고 지나간 자리를 검토하며 최순실을 추적하던 그가 2016년 9월 28일자 한겨레에 쓴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님께>란 제목의 칼럼은 언론계에 널리 회자되었다.

(...) 취재를 하면 할수록 조선의 보도가 훌륭하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취재 그물은 호수를 다 덮도록 넓게 쳤는데도 그물코는 피라미 한 마리 빠져나갈 틈 없이 촘촘했습니다. 7월27일이 첫 보도인데 이미 4월부터 취재에 들어갔더군요. 재단의 어느 관계자는 저희 기자를 보자마자 버럭 화를 내며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조선 기자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달라붙었으면 그랬겠습니까.

(...) 저희가 조선의 뒤를 좇다보니 ‘잃어버린 고리’가 두세 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사건의 전체 모자이크를 끼워맞출 수 있는 ‘결정타’들이죠. 조선이 물증을 확보한 듯한데 보도는 실종됐습니다. 기사는 언제 햇빛을 보게 될까요. 나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힘 빠졌을 때라면 가치가 있을까요? 사장님은 기자들 수백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깥 사람들을 만나서 틈만 나면 기자들 자랑을 해대는 통에 “자식 자랑 하면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죠. 그렇게 아끼는 기자들의 땀방울이 어느 캐비닛에 처박힌 채 증발돼가고 있습니다.

기자 개개인보다는 조선의 이름값이 더 중요하겠죠. 사장님은 몇 년 전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에게 저녁을 사면서 이런 건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 언론이 이념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념 위에 언론이 있다.” 폭탄주는 끊으셨기에 알잔은 맹물로 채웠지만 건배사 내용만큼은 100% 원액처럼 진했다고 하더군요. 사장님은 젊은 시절 방갑중이라는 이름의 성실한 외신부 기자였고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고도 들었습니다. 사장님이 당당할 때 권력도 감히 조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겁니다.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십시오.

나는 이 인사에 대한 가치판단은 일단 피하려고 한다. 오히려 이 인사를 통해서 바뀌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방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청와대 박수현 대변인(왼쪽)과 김의겸 내정자가 지난달 1월 30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정부 부처 장ㆍ차관 워크숍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연합뉴스)

언제부터인가 한겨레가 ‘친안반문’이라는 이야기가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의 상식이 되었다. 여기서 ‘한겨레’라 상정된 악역은 ‘한경오’라는 진보언론으로 확장되기도 하고(비약1),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언론’이 되기도 한다(비약2). ‘비약1’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가는데 ‘비약2’가 되면 사실 아득해진다.

모든 언론이 ‘친안반문’이라는 말이 납득이 되려면 첫째, 한국 사회의 갈등구조가 양파전으로 수렴될 만큼 단순하고, 둘째, 언론이 그중 철저하게 한쪽을 위해 일해야 한다. 그들의 주장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상대방은 ‘기득권세력’이 되고 우리는 ‘개혁세력’이란 전제 하에서 말이다.

이쯤 되면 세계인식이 특촬물이나 로봇물 수준에서 멈춘 것 같지만, 일단 넘기자. 참여정부와 그 이후 있었던 비극이 그러한 인식을 강하게 추동했다는 점을 이해할 맥락은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그때그때 바뀌는 것은 참으로 문제다. 아예 일관되게 저렇게 생각한다면 특별히 한겨레만 욕할 이유도 없을 듯한데, 어쩔 땐 ‘모든 언론’이 아닌 ‘진보언론’만 주목되고 또 어떨 땐 ‘한겨레’만 욕먹는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엔 구조가 있을 뿐 세부는 그때그때 바뀐다. 김의겸 대변인 선임 이후 언론에도 기사화된 몇몇 누리꾼들의 반응은 그 양상을 보여준다.

이야기 속 한겨레는 원래 친안반문의 집단이었다. 김의겸이 대변인으로 선임되자 그는 ‘예외’ 사례가 되었다. 그걸 입증하는 예화가 등장한다. 한겨레 편집국에서 경원시당했고, 애초 정권 초 대변인 선임이 되려고 했고 본인도 원했는데 한겨레 젊은 기자들이 뜯어 말려서 방해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각각 살펴보자. 김의겸 대변인의 예전 칼럼을 살펴보면 그를 ‘친문’으로 분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에 그보다 친문 성향이 없을 거라고 누가 주장한다면, 나는 그 말을 믿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의 성향을 쉬이 추정할 수 있는 건 그가 연차가 높은 기자라 상대적으로 본인의 견해를 자유롭게 썼기 때문이다. 한겨레 편집국에서 그가 ‘튀는’ 사람이었단 얘기는 들은 바가 없다. 이 부분은 사실상 날조된 얘기에 해당한다.

어찌 보면 두 번째가 더 문제다. 두 번째 얘기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안다. 몇 년 전부터 관찰한 바 이런 이야기가 생성될 때 근거가 될 만한 정치권‧언론계 예화를 슬며시 흘려주는 이들이 보인다. 조직적 관리인지 아닌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저 거대한 자발성의 파도에 그런 물방울 몇 개가 탑승했다 한들 조작이라고 폄하할 수도 없다. 그러나 진심으로 저리 믿는다면 참으로 치사하고 옹졸한 일이다.

한 번만 더 물어보고 생각해보라. 한겨레 기자들이 ‘친안반문’이라서 선배를 말렸을까? 당연히도, 어제까지만 해도 언론인이던 사람이 청와대로 들어가는 풍경을 우려했을 것이다. 나는 앞서 이 인사에 대한 가치판단은 안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둘러싼 맥락은 얘기해야 한다. 진보언론, 그리고 기자들은 지난 보수정부 10년 동안 이런 사례들을 ‘폴리널리스트’라고 불렀다. 수십 인을 묶어서 명단을 공개하고 그랬다. 과거 민주정부 시절에도, 그리고 문재인 정부 역시, 질적‧양적인 측면에서 모두 그와 같은 종류의 ‘폴리널리스트’를 양산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아침에 부장회의 들어갔다가 저녁에 청와대 대변인이 된 민경욱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 청와대 대변인 시절 민경욱 의원 모습(연합뉴스)

하지만 이를 떠나 개별 사례에 대한 원칙의 적용 측면에서 본다면 당연히 논의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원칙은 무엇이고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따져야 할 문제다. 후배 기자들은 김의겸 대변인이 한 발이라도 더 민경욱으로부터 멀리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선 이런 문제들이 전부 사라지고 한겨레가 악역인 증거로서의 예화만 남는다. 마치 ‘짤방’처럼.

사실 기자의 기사가 어떤 식으로 편향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앞서 내가 김의겸 대변인의 성향을 쉬이 추론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한 바 있다. 비슷한 이유로 굳이 분류한다면 ‘친문’이거나 적어도 ‘반안’은 될 거라 보는 이로 성한용 선임기자가 있다(매우 자의적인 규정에 실명을 거론해서 죄송하지만 이 어지러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예화가 반드시 필요함을 양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2012년 그는 <안철수 대통령은 없다>는 칼럼을 쓴 적이 있고, 정권 초 한겨레가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친안반문’으로 몰려 욕을 볼 당시에 내가 김의겸과 성한용의 몇몇 칼럼들을 열거하며 반례를 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2012년 한겨레 정치부 기자들이 낸 <안철수를 읽는다>를 훑어봐도 성한용은 가장 안철수에 회의적이지만, 이러면 저 책을 냈다는 사실 자체가 한겨레가 ‘친안반문’이란 논거가 될 게다.

이건 나 자신도 종종 당하는 일이다. 2011년에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라는 공저를 낸 바 있는데, ‘진신류’(지금은 당 이름이 바뀌었지만 과거 ‘진보신당’ 류를 지지하던 이들이란 의미의 조어였다)와 ‘한겨레’가 ‘친안반문’이란 사실의 근거로 종종 활용된다(‘됐다’고 쓰고 싶은데, 가끔 아직도 나온다).

시기를 보면 알 수 있듯 저 책은 안철수가 정계 입문도 하기 전 불어 닥친 안철수 현상에 대한 비평서였다. 나는 대략 그 현상에서 정당정치가 담아내지 못하는 시민의 욕망을 주목하고, 그걸 정치가 담아내기 위해선 어떠한 일을 해야 할 것인가란 취지로 글을 썼다. 첫 꼭지를 썼기에 안철수의 인생 이력과 그가 열광의 대상이 된 상황에 대한 개략적 서술도 필요했다.

그런데 그 책에서 공저자인 이재훈 한겨레 기자는 안철수를 매우 혹독하게 비평했다. 내가 보기엔 아직 정치에 입문도 안 한 이가 그간 한 말을 긁어모아서 그러는 건 다소 과했다. 책 취지와도 약간 안 맞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저 책은 ‘진신류’와 ‘한겨레’가 ‘친안반문’이란 사실의 근거가 된다. 방금 언급한 두 권의 책 표지가 ‘짤방’으로 제시되면 논증은 완성된다(한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2011년~2012년의 안철수의 지지층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모두 기억하지만 이야기를 만들 땐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안철수를 읽는다 - 한겨레 정치부 기자 5인의 라운드 토크’ 표지 사진 Ⓒ한겨레출판

“이야기의 근거가 다만 짤방 몇 개만으로 설득력을 획득하고, 그것을 한 집단이 공유하며 비슷한 식으로 신념화된 다른 집단과 투쟁을 벌이는 시대”. 김의겸 대변인 선임에서 ‘폴리널리스트’ 논란보다 내가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이것이다. 이는 문재인 지지자들만의 특징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가장 다수이며 잘 조직화(자발성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쓴 것이 아니다)되어 있을 뿐이다.

대략의 이념적‧정책적 지형도라면 모를까, 언론사가 누구에게 어떤 방면으로 편향적인지를 논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질적 접근과 양적 접근이 모두 필요할 것이고, 세심하고 사려 깊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이랴. 그 연구자, 혹은 연구그룹도 ‘친안반문’이나 ‘친문반안’으로 호명되면 그만일 것을. 담론이 그런 심판관, 내지는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 것을. 다만 자기 편 망상에 필요한 논거로 사용할 때에만 실탄처럼 동원되는 것을.

문재인 지지자들은 2017년 대선 국면에서 잠깐 안철수 후보가 치고 올라왔던 국면의 보도를 잘라놓고 ‘모든 언론이 안철수 편이었으며, 실체도 없는데 언론이 만들어낸 양강구도였다’라고 말한다. 요즘 화력이 많이 줄어서 그렇지 ‘문빠’ 아닌 ‘안빠’의 입장에선 ‘모든 언론이 문재인 편이 되어 안철수를 밟으면서 무너뜨린 양강구도’였을 것이다. 사실상 어느 쪽도 실체가 있는 말은 아니다.

인맥그룹의 동질성 정도를 본다면 진보언론 및 담론 종사자들은 ‘안철수 그룹’보다 ‘문재인 그룹’에 훨씬 더 친화력이 높다. 이를 부정하려니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일례로 86세대 운동권 엘리트들의 학벌주의가 호명된다. 노무현 대통령 때에야 일부 수긍할 수 있는 얘기였지만, 그 86세대 운동권 엘리트가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있는 게 민주당이요, 그 민주당 주류가 직접 호명하고 응답받은 정치인이 문재인 아닌가? 문 대통령은 고졸도 아닌데, 그러면 이젠 ‘경희대도 무시당한다’고 한다. 이야기를 위해서 역사가 바뀐다.

마치 고구려가 부여 동명왕 설화를 차용해서 주몽설화를 만든 것처럼, 노무현 때 얘기를 갖다 썼기 때문에 이제는 와해됐다고 볼 수밖에 없는 ‘민평련’이 기득권으로 호출된다. 해모수 아들인 해부루 아들 내미인 금와의 부인이 키운 게 주몽인데 주몽은 해모수 아들이라는 수준의 얼기설기 이야기가 탄생한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증거’가 하나는 있다. 나는 이런 이야기의 힘을 유지시키는 매체환경이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내가 불과 십 년 전에 겪은 이들보다도 훨씬 완고하게, 자신이 싫어하는 모든 것들은 한 패거리라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무리한 망상처럼 보이더라도 웹에서 검색하면 그걸 증명하는 듯한 사례 한두 개는 긁어다 붙일 수 있다. 그러니 그 망상이 지속된다.

가령 페미니스트도 자유한국당도 싫은 어떤 (우리 시대에) 평범한 남성 하나를 상상해보자. 그는 페미니스트가 자유한국당의 사주를 받아 문재인 정부를 괴롭힌다고 망상한다. 그렇기에 탁현민 등을 문제삼는다고 믿는다. 근거야 금세 제시된다. 여성운동하다가 그쪽 정당으로 넘어가서 한 자리 한 사람들을 제시하면 될 게 아닌가? 그렇게 검색 이삼 분이면 망상의 증거로 삼을 만한 짤방이 발견된다.

나는 내 주위에서 이런 남성들을 몇 번 겪었고, 내가 아무리 그건 아니라고 설명해도 ‘근거’를 가져오는 그들에게 지치고 말았다. 눈 앞에서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내 말에 심드렁하게 동의했더라도 후에 웹에서 누군가 만든 ‘짤방’을 발견하면 그걸 들고 와서 “내가 이럴 줄 알았어!”를 외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표준적인 자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겨레신문 2017년 8월 25일자 2면에 실린 알림.

가장 압권이었던 광경이 있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수치에 국한된 건이다. 2017년 5월 일군의 문재인 지지자들이 “한겨레는 이명박 시절 김윤옥에게는 ‘여사’라고 붙였고 깍듯했다. 하지만 과거 권양숙 여사에겐 ‘씨’라고 호칭했다. 노무현이 만만했기 때문이다. 이제 김정숙 여사에게도 ‘씨’를 붙이고 있다”고 했을 때, 나는 그들도 나도 좋아하는 검색이란 걸 네이버 뉴스에서 해본 바 있다. 이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으니 당시 한겨레 해명(‘여사’가 아닌 ‘씨’로 표기하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며 종종 일관성 없는 실수가 있었을 뿐)이 타당했는지 아닌지는 이 검색 결과가 명확한 답을 줄 것이다.

2017년 5월 당시 네이버 뉴스 검색 결과
(이명박 영부인) "김윤옥씨" 342건 / "김윤옥 여사" 36건
(노무현 영부인) "권양숙씨" 481건 / "권양숙 여사" 152건
(김대중 영부인) "이희호씨" 396건 / "이희호 여사" 169건 / "이희호 이사장" (직함이 있었기에 추가) 189건

참고로 이 위로 올라가면 ‘뉴스라이브러리’로 가야 정확히 볼 수 있어 같이 비교할 일은 아니다. 원칙에 대한 오류가 1할이면 너희들이 바보 아니냐고 조소할 사람들이 있을 텐데, 기사를 직접 훑어보며 확인한 결과 ‘여사’라는 표현의 대부분은 연합뉴스 기사 전제이거나 취재원이 따옴표 안에 ‘여사’란 말을 쓴 것을 그대로 옮긴 기사였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 수많은 ‘짤방’이 “한겨레는 이명박 시절 김윤옥에게는 ‘여사’라고 붙였고 깍듯했다. 하지만 과거 권양숙 여사에겐 ‘씨’라고 호칭했다. 노무현이 만만했기 때문이다. 이제 김정숙 여사에게도 ‘씨’를 붙이고 있다”라는 이야기의 근거로 제시됐음을 알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근거로 제시한 짤방 중엔 버젓이 다른 매체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도 있었다!

진보언론은 비판받을 수 있고, 변화한 시대와 매체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노력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 반성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반성을 강요받았다. 문제는 모든 집단이 모든 다른 집단에 대해 이런 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분명 어느 순간 본인들도 이런 식의 피해를 받게 될 거라는 거다. 그들이 욕하는 ‘기레기’의 ‘날조’와 ‘왜곡’이란 것도 사실은 이런 방식인 것 아닌가. 모두가 한 바퀴씩 돌면서 가해자이면서 피해자가 된다면 모종의 자정에 대한 노력이 발생할 거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결말은 ‘또 바뀐 이야기’다. 국민의당 등이 김의겸 대변인 선임을 ‘코드 인사’라 비판했다. 대변인은 자기 소신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권한을 행사해야 할 보통의 다른 공직과는 다소 다르기에, 나는 김의겸 대변인이 기자 출신이란 게 다소 걸릴 뿐 ‘코드 인사’임이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통 논의를 피하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엊그제까지 ‘친안반문’ 언론의 일원이었던 김의겸은, 대변인 선임 이후 잠깐 정권 지지자들에 의해 ‘소신있는 친문’이 되었다. 하지만 ‘코드 인사’ 논란이 일어나자 곧 지지자들은 “한겨레 기자를 선임했는데 무슨 코드 인사냐”(한겨레는 본시 우리 코드와 다르다는 의미)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웃기엔 좀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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