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수치만으로 보면 <그냥 사랑하는 사이(이하 그 사이)>는 보잘 것 없다. 1회 2.409%(닐슨 코리아 케이블 유료 플랫폼 기준)가 최고 시청률로 내내 1%대의 시청률을 답보했다. 하지만, <그 사이>를 그저 시청률로만 평가하는 건 아쉽다. '재난 후일담'이라는, 어쩌면 이 시대에 가장 요구되는 장르에 과감하게 발을 내디딘 유보라 작가와 <그 사이> 제작진의 도전은 오히려 시청률과 상업적 성과를 넘어선 드라마적 가치의 확인이다. 천만이 넘었다고 그 영화가 좋은 영화가 되지 않듯, 1%대의 작은 목소리라도 <그 사이>의 존재감은 빛난다.

슬픔은 노상 우리 곁에 있어 - 마마(나문희 분)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오프닝에서 보이는 바닷속에 잠긴 채 기운 배, 그렇다. <그 사이>는 대놓고 '세월호'를 비롯한 우리 사회가 겪은 재난과 그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95년 6월 29일에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가깝다.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라고 온 국민이 경악해 마지않던 사건, 하지만 바로 그 전 해에 성수대교가 붕괴됐었다. 이른바 건설 입국으로 성장해온 발전 경제의 부실한 기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참사 현장에 다시 쇼핑몰이 들어서고 또 다시 철근이 빼돌려지고 부실한 지반에 얼렁뚱땅 건물을 올리려 하듯,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대한민국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를 겪었고 결국 2014년 세월호에 이르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고 그때마다 잊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삼풍백화점 자리엔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섰고 추모비는 멀찍이 양재 시민의 숲 한편으로 밀려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지난해 12월 11일 첫 회를 연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바로 그 '아스라한 기억'이 된 붕괴 사고를 불러온다. 하지만, 드라마가 불러온 건 그저 에스몰 참사가 아니다. 에스몰로 상징되는 '재난민국',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재난 사고의 피해자들이 주인공이다. 재난 사고에 대해 다룬 다큐는 많았다. 그리고 얼마 전 종영한 <블랙> 드라마 속 사건으로 재난 사고가 등장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재난을 본격적으로 마주하고, 재난 속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밀도 깊게 다룬 이야기는 <그 사이>가 처음일 것이다.

이강두(이준호 분)와 문수(원진아 분)는 그곳, 에스몰에 있었다. 아동 모델로 그 쇼핑몰에서 촬영이 있었던 동생과 함께, 아니 동생의 보호자로 에스몰에 갔던 문수는 남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다른 층으로 자리를 옮긴 사이 사고를 당했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일하셔서 아버지를 만나 그곳에 간 강두 역시 붕괴된 건물 사이에 있었다. 최후의 생존자가 된 강두와, 강두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한 발 먼저 빠져나간 문수. 하지만 그곳을 빠져나온 건 두 사람의 몸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소년과 소녀였던 그들은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다.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그러나 두 사람이 그곳에 머무는 방식은 다르다. 그곳에서 다리를 다친 상처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 진통제를 수시로 삼키는 강두. 그는 붕괴 현장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심지어 철근을 빼돌렸다며 '가해자'가 된 아버지와, 자신을 돌보다 쓰러진 엄마 대신 일찍 철든 동생의 보호자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거리로 내몬다. 그러나 강두가 진통제를 수시로 삼키는 이유는 그저 그곳에서 다친 상처의 고통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과 함께 나오지 못한, 홀로 갇힌 그의 곁에서 먼저 숨을 거둔 소년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 악몽으로 수시로 찾아와 간에 독성이 있는 '파란 약'을 움켜쥐게 만든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또 다른 형태로 드러난다. 동생의 보호자로 그곳에 갔던 문수는, 사고 당시의 구체적 상황을 머리에서 지워버린다. 그럼에도 기억은 없지만 죄책감은 남았다. 동생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그 짐은 ‘딸 잡아먹은 년’이라 욕을 들어 먹으며 꿋꿋하게 목욕탕을 지키며 날마다 술과 함께 사는 엄마의 보호자로 자신을 가둔다. 나지도 않는 기억을 들추는 대신 온전히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하루하루를 짊어지며 살아가는 것이 이제 막 피어나는 청춘 문수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 붕괴된 에스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두 사람만이 아니다. 이른바 '책임자'로 지목되어 그 대가로 스스로의 목숨을 거둔 설계자였던 건축가의 아들 서주원(이기우 분)도, 서주원과 연인이었지만 시공사 사주의 딸로 하루아침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달라진 정유진(강한나 분)도 여전히 그날 그곳에 머물러 있다.

내가 이 손 안 놓는다 - 강두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드라마는 이렇게 에스몰 붕괴 사고와 관련된 이해관계로 얽힌 네 젊은이들을 내세웠다. 기억해서 혹은 기억하지 못해서, 그리고 남겨져서 아픈 그들은 우리 시대가 겪었던 그 '참사' 후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초반 그들 각자의 트라우마를 곡진하게 살피던 드라마는 그러나 트라우마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이>의 가치는 재난 후일담을 넘어,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그 벽을 깨고 온전히 자신으로 다시 서는 젊은이들의 '승리담'에서 빛난다. 스스로 각자 자신의 무게로 짊어졌던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용기 있게 세상의 몫으로 던지며, 그들 각자가 웅크렸던 동굴 속에서 한 발씩 내딛는다.

에스몰 현장에 다시 세워지는 쇼핑몰 현장에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세워진 추모비를 부순 강두. 주원의 호의로 그의 설계 사무소에서 에스몰 자리에 다시 세워지는 건물 설계에 간여하게 된 문수. 아버지의 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다시 그 자리에 선 주원. 그리고 여전히 그를 놓지 않는 유진. 네 사람은 반성 없이 되풀이되는 부실 공사의 재연 현장에서 각자 자기 어깨 위에 얹힌 짐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그 짐을 풀어놓는 데, 바로 '사랑'이 매개가 된다.

우연히 깡패들에게 맞은 채 골목 구석에 쭈그려 피를 흐리던 강두를 발견한 문수, 그리고 그들의 우연 같은 에스몰 현장에서의 만남. 우연 같은 필연을 통해 그들은 그 '기억'을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자신의 나침반으로 강두를 주원이 현장에 보내듯, 강두와 문수는 외면하는 대신 추모비 재건립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나간다. 그를 위해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남겨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두 사람,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걸음씩 들어서는 자기 자신, 그 버거운 길을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어간다. 사랑을 통해 용기를 얻고, 그 용기를 통해 자신을 풍성하게 하는 대승적 사랑의 길을 느리지만 꿋꿋하게 <그 사이>는 지난 16부의 시간을 걸어왔다.

마지막 회, 간 혼수에 빠지며 위독했던 강두에게 기적과 같은 새 삶이 찾아왔다. 아니, 그에게 찾아온 건 그저 기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새 삶은 죽을 뻔한 강두에게만 찾아온 것도 아니다. 과거에서 각자 힘닿는 대로 도망치려 했던 피해자들이 스스로 다시 과거를 직시하고, 거기에 얽혀진 매듭을 풀어나간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덮여있던 두터운 딱지는 아물었고 비로소 세상의 공기와 호흡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이 모두에게 찾아왔다.

강두에게 남겨진 유산의 땅, 에스몰 붕괴 사고 그 중심에 붕괴 사고 현장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추모비. 그 상처 입은 기억의 불편함에 강두와 문수는 입을 모아, 시간이 흐른다고 잊는다고 상처가 덮어지는 것은 아니라 강변한다. 오히려 기꺼이 그 불편함을 내 안에 껴안을 때, 기억은 역사가 된다. 삼풍에서 시작된 '재난 후일담'은 결국 2018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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