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 대해 말하자고 하면 지난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 때 일어난 일을 빼놓을 수 없다. 두 정상이 프로 골퍼와 함께 골프를 치는 도중에 아베 신조 총리가 벙커 안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고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어떻게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뒤를 헐레벌떡 쫓아가려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해서 많은 화제가 됐었다.

아베 신조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 탄생 이후 미국 핵심부에 대한 개입 수단을 잃지 않기 위한 온갖 노력을 다 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에 굳이 일본 일정을 넣도록 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 결과로 론-야스(로널드 레이건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 미국과 일본이 또 한 번의 밀월관계를 구축하게 됐다는 해석이 신문 지상에 심심찮게 실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베 신조 총리는 오바마 정권 시절부터 미국과 특별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개헌을 통한 보통국가 지위의 탈환을 기도하려면 미일관계의 개선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대리인을 자임하는 게 재무장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일본 언론은 아베 신조 총리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문재인 정권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하기로 한 이유로 크게 세 가지를 꼽고 있다. 첫 번째는 지난 정권에서 이뤄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합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사를 직접적으로 피력하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통한 비핵화 요구라는 태도의 원칙을 문재인 정권에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유치한 입장에서 이웃 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불참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기에 결단했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4일 관저에서 기자들과 만나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참석 및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결국 핵심은 개헌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의 재무장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 첫 번째는 누구를 향한 재무장이냐는 것이며, 두 번째는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주변국들의 불안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대북 강경노선을 말하면서 한국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아베 신조 총리의 방중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답방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한국과의 관계개선은 어찌됐든 평창동계올림픽에 참석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본의 시각으로 보자면 미국의 역할이 여기서도 필요하다. 우리는 평양올림픽이냐 아니냐를 놓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은 국제정치적 전장이 이미 돼있는 상태다. 남북이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해 협력 관계를 형성하는 동안 미국은 밴쿠버에 과거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들의 외교장관들을 모아 따로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 모인 각국 외교장관들은 문재인 정권의 대화 노력을 지지하면서 한국 정부가 대북문제에 있어 미국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했지만, 여전히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합의를 이뤘다. 이 자리에서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중국과 러시아가 대북제재의 틈을 만들고 있다며 해상차단의 확대 및 강화를 공언했다. 이에 중국과 러시아는 이 회의 자체를 냉전적 사고의 산물로 규정하며 반발했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최근 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의 메시지를 ‘하이재킹’할 것이 우려된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앞서 밴쿠버 회의에서 북한에 대한 가장 강경한 태도를 주문한 국가는 일본이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아베 신조 총리의 방한 결정에는 미국의 요구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미국이 일본에게 함께 평창에 가서 북한 대 미국 일본의 구도를 만들자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 입장에선 상당히 껄끄러운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왜냐면 그 다음 수순은 우리더러 “북한 편이냐, 미국-일본 편이냐”를 묻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괌 미군기지 등에 전략폭격기를 배치했고 오키나와 인근에서 일본 자위대와 연합훈련도 실시했다. 미국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단지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결과인지, 아니면 문재인 정부의 기대처럼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북미대화를 위한 레버리지 확보를 위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남북관계 개선의 속도 조절을 원하는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우리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를 찾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언론과 자유한국당 내의 인사들은 문재인 정권이 민족에 대한 어떤 개인적 감상이나 욕망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북한에 굴종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며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런 복잡한 맥락에서 국제정치적 게임의 맥락을 모르거나 혹은 외면한 결과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오히려 한국 정부는 현재 북핵문제 해결을 주도하고 있다기보다는 상황에 계속 떠밀려가고 있다. 이제 미국은 노골적으로 평창동계올림픽 일정 이후 북미 대결구도를 시사하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서구언론은 미국이 ‘코피 작전(Bloody nose)’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해왔다. 북한의 코를 때려서 피를 내겠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는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한 우리 정부의 노력은 ‘시간벌기’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간벌기 정도의 의미도 감지덕지다. 어쨌든 의미가 있다면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중력을 갖춰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골프장의 아베 신조 총리처럼 우스꽝스러운 신세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보수세력은 그런 지혜를 발휘하기는커녕 당장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데 여념이 없다. 하긴 이명박 전 대통령 문제를 놓고 ‘정치보복’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는, 문재인 정권이 북한에 과도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게 정치공학적으로는 더 현명한 처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정치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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