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그 주변인이라면 작금의 매체들이 홍 대표를 다루는 방식이 무척이나 억울할 것 같다. 사실 여의도 정치의 문법으로 볼 때는 홍 대표가 2016년의 국면에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다.

‘성완종 리스트’에서 주요 인물로 지목됐을 때, 그의 정치생명은 사실상 끝난 것으로 여겨졌다. 경남도지사로 내려갔을 때에도 이미 그는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정치인으로 여겨졌다. 2016년 10월말 최순실 게이트 이후 엉망진창 아수라장이 펼쳐졌을 때는 더 이상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잊혀졌을 때쯤, 2심에서 무죄판결이 나왔다. 무죄판결 받는 날 그는 ‘양박, 그러니까 양아치 같은 친박’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핍박받은 보수정치인이라 치장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본인이 나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어느 쪽도 선택이 가능했을 테지만, 전자를 선택했다.

19일 오후 제주시 용담동 미래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제주도당 신년인사회에서 홍준표 대표가 연설하고 있다(연합뉴스)

이후 홍준표의 대선 행보는 틈 하나라도 보이면 거기에 자신을 내던져 쑤셔 박고 틈을 벌려 뿔뿔이 흩어진 자유한국당 지지층을 규합하는 것이었다. 운도 약간 따랐다. 안철수 후보에 대한 보수파 유권자들의 실망이 결국 그에게 틈을 내줬다.

2017년 대선 결과는 양가적이라 봐야 할 것이다. 일패도지의 상황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24.0%로 2위를 차지한 것은 그의 공로였다. 그렇기에 자유한국당 내부에 별다른 세력도 없던 그가 대선 이후 당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선거 캠페인은 후유증도 남겼다. 수도권에선 여전히 안철수 후보가 2위였다. 홍준표 후보가 입은 ‘트럼프 카피캣’의 옷은 그 자신에게는 꼭 맞는 옷일 수 있었겠으나, 한국의 중노년 보수층에겐 낯설고 거북했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선거 막판 그의 선전은 대구·경북 유권자들이 잠깐 변화된 현실을 외면하고 ‘예전처럼 우리가 결집하면 경남과 강남이 따라와서 절반은 될 것이다’라며 집단적 자기 최면을 걸었던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대선이 좀 더 뒤에 치러졌다면 지지층이 더 결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외부에서 봤을 땐 그 지지율이 그 선거캠페인으로 가능한 최대치로 보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자유한국당에서 놀라운 수단을 보여줬다. 당내 세력이 없다는 약점으로 바른정당 의원들을 압박했다. 홍준표가 당내 최대계파의 수장이었다면 바른정당 의원들은 쉬이 합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친박이 수적으로 우세하고, 홍준표에게 명분이 있다면, 바른정당 의원들은 복당 후 친홍이 되면서 홍준표와 권력을 분점할 수 있을 터였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바꿔 바른정당을 흔들었고, 적지 않은 의원들이 바른정당에서 이탈하여 자유한국당으로 오게 만들었다. 바른정당에 탈당했다가 막 복당한 김성태 의원이 원내대표에 당선된 것은 민주당 계열의 정당에서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사태, 이해관계의 이합집산이 거의 정치예술의 수준으로 승화된 사건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면, 추미애 민주당 대표가 2004년 열린우리당과 갈라진 민주당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한 후 친노계에게 용서받기까지 십 수 년이 걸렸다는 사실과 비교해보라. 그 추미애 대표가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민주당을 떠나 정몽준 후보에게 갔던 김민석을 복권시키려고 하는데도 그게 여의치 않은 현실과 비교해보라.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자유한국당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살펴보면 흐름이 보였다. 홍준표 대표, 혹은 친홍세력은 첫째, 박근혜 전 대통령을 출당시켜 친박에게서 당을 가져오려고 했다. 둘째, 그들은 다시 한 번 서민 노선을 강조하면서 중도파의 지지를 복원하려 했다. 그들의 셈법으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중산층과 노조의 눈치를 보느라 ‘10% 기득권’의 이해를 대변할 뿐 서민정당이 되지 못할 거라 봤다.

그러나 그것은 꼼꼼히 살펴본 이들에게나 보였다. 자유한국당에 대한 대다수 시민의 실망은 그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유한국당에서 흘러나오는 긍정적인 신호를 독해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들은 자유한국당에서 시대착오적인, 이 말로 부족하다면 시대낙오적인 태도를 취할 때에야 반응하고 자유한국당을 조소했다.

그래서 자유한국당은 억울할까? 그렇게만 볼일이 아니고, 책임이 있다. 그것은 당장의 이익을 위해 탄핵과 대선 국면에서 태극기 집회 세력과 어느 정도 선을 긋지 못한 선택이 초래한 일종의 비용청구서였다.

보수정부 십 년 동안 마치 진보적 시민사회 단체를 ‘미러링’하듯이(물론 그들이 이해한 바대로) 급조해낸 우파 시민사회 단체는 시민의 눈이 아닌 자신들의 편견으로 사태를 보고 자유한국당에 이를 따를 것을 요구했다. 자유한국당 출입 기자들은 “요즘 자한당 사람들은 무슨 독립투사들 같다”라면서 혀를 끌끌 찼다. 류여해 전 최고위원이 라이언 인형을 들고 회의에 난입하는 순간, 자유한국당 혁신을 위한 그 수많은 시도들도 함께 코미디로 전락했다.

한때 홍준표 대표는 그를 잘 아는 이들에게 변방의 사나이로 불렸다. 2010년에 홍 의원이 낸 책의 이름이 <변방>이었다. 당시 김의겸 한겨레 정치부문 편집장은 <문제적 인간, 홍준표>라는 칼럼을 통해 홍준표가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고 썼다. 대선 과정에서 그의 삶의 이력이 예전보다는 더 조명됐으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으리라.

2010년의 김의겸은 이렇게 썼다.

(...) 특히, 그는 박근혜 의원을 의식하고 있다. 그가 검사시절 넘어야 할 산이 검찰 지도부였다면, 이번에는 박 의원이다. 그는 박 의원에 대해 “누구는 숨을 헉헉거리며 가랑이 찢어지게 뛰어도 결승점이 아득한데, 누구는 손수건 살랑살랑 흔들며 우아하게 걸어가도 바로 눈앞이 결승점”이라며 부러움과 한탄을 표시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박근혜 의원을 넘어설 카드로 ‘서민’을 선택했다.

그가 당에 제안해 서민정책특위를 만들고, 그 위원장을 맡은 것이다. 그는 서민정책특위에서, 대학등록금, 택시 문제, 재래시장 대책, SSM(기업형 수퍼마켓)법안 등을 집중적으로 다뤄 구체적인 대안 마련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그는 “가진 자가 양보하고 가지지 못한 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민정책을 강도높게 추진할 것”이라며 “한나라당을 반드시 리모델링하겠다”고 말했다. (...)

우리는 그가 당시 박근혜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박근혜가 망치를 들고 부셔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정당을 복원하기 위해 다시 ‘숨을 헉헉거리며 가랑이 찢어지게 뛰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홍준표는 여전히 변방에서 중심을 지향하던 이, 서민을 말하던 이인 것으로 보인다. 도무지 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친박 방향으로 너무 멀리 가버린 김문수 전 도지사를 향해 그가 페이스북에서 쓰는 글을 봐도 그리 느껴진다.

그러나 정치인은 자기 자신임을 고수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한때는 김의겸 한겨레 전 선임기자나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등 민주당 성향의 언론인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그 캐릭터는 이제 사람들에게 너무 낡은 것이 되어 버린듯하다.

당연히 그가 기억하는 ‘서민’의 문제도 여전히 대한민국에 존재하지만, 이제 자신을 선진국 시민으로 여기는 청년층 일각이 느끼는 빈곤과 박탈감은 그 문제의 맥락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그가 자유한국당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 놓쳐서는 안 되는 냉전보수적 서사들은 그의 정치인생에서 일관된 지표였던 서민 지향과도 삐그덕 댈뿐더러 사람들이 그런 지향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홍준표라는 정치인에게만 슬픔인 게 아니다. 자유한국당이란 정당의 존립여부와 직결된 문제이다. 현재 자유한국당의 환경에선 그나마 홍준표 노선이 덜 옛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충분히 옛날 것이고, 그보다 새로운 것들은 이제 자유한국당에 승선하기를 주저한다.

패잔병이라도 사기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 탓인지 요즘 홍 대표는 갤럽 등 여론조사 기관을 믿을 수 없다고 공격하고 있다. 그는 응답률이 낮은 조사를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갤럽 조사는 응답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여론지형도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자유한국당과 홍준표 대표의 태도는 이미 소망적 사고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여론조사 기관 사람들도 당연히 응답을 회피하는 ‘샤이 보수’도 있을 수 있다고 보지만, 그래봐야 5~10%를 좌지우지한다. 일관된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 민주당 지지율, 그리고 그것들이 이슈에 따라 등락을 거듭하는 상황을 본다면 판단은 명쾌하다. 여론조사는 현실의 상당 부분을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자유한국당이 그 현실을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유한국당은 총선의 시기가 아직 멀리 남았다는 일정의 현실과,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정치력과 리더십이 상대적으로 더 허약했다는 상황의 현실에 기대어 버텼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사실을 냉정하게 인정할 때에야, 홍준표 대표와 자유한국당은 존립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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