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전을 두고 시쳇말로 생뚱맞은 일이 벌어졌다. 남원에서 춘향제를 열어온 단체(춘양문화선양회)가 방자전이 춘향을 모독했다면서 상영금지를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 일을 받아드리고 있는데, 과연 실존 인물보다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설이 더 우세한 춘향이에 대한 모독이란 명제가 성립할 수 있을까 먼저 따져볼 일이 아닐까 싶다.

그보다 먼저 한국은 성역이 지나치게 많다. 이념, 권력자 그리고 종교 등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들이 즐비하다. 거기다가 춘향이까지 성역에 입성시키려는 것은 지나친 자기애의 발휘이다. 물론 춘향이의 정절과 지조는 그것이 단지 몽룡에 대한 수절로 국한시킬 수 없는 저항의 의미를 끌어낼 여지가 있지만 춘향이 방자와 통정했다는 상상에 대해서 발끈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럼 춘향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문자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만화본 춘향전이다. 그것은 이미 구전되는 즉 다시 말해서 소리꾼 혹은 이야기꾼들에 의해서 저자에 회자되던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니까 최소 300년의 역사를 가진 인물이며 한국 대표 여성상의 하나이다. 춘향하면 떠오르는 절개는 판소리 십장가로 상징되는 옥중소리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런데 그 전에 살펴볼 일이 있다. 이몽룡과 춘향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다. 비록 원나잇스탠드는 아니지만 이 두 사람은 단오날 광한루에서 만나 곧바로 수작을 걸어 인연을 맺는다. 비록 퇴기의 딸이라고 하지만 몽룡의 대시에 춘향 또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결국 몽룡의 배경을 안 어미 월매의 적극적인 주선에 의해서 어린 몽룡과 춘향은 첫날밤을 맞는다.

엄마가 적극 밀어줬다고는 하지만 춘향 역시 집안 좋고 잘생긴 몽룡의 구애에 뜨겁게 반응한 것이다. 그런 과단성이 있기에 후일 변학도의 수청 요구를 목숨 걸고 거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몽룡의 부친이 남원의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이 청춘남녀는 생이별을 겪게 되는데, 판소리 바디마다 차이는 다소 있지만 김소희 제를 기준한다면 떠나는 몽룡을 향해 피끓는 심정을 토로한 오리정 이별 대목은 애간장을 끓게 한다.

그렇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을 보면 춘향은 아주 표독스럽게 몽룡을 성토하는 대목도 존재한다. 춘향을 해석하는 많은 글들이 존재하지만 오리정이별대목은 슬픔과 동시에 몽룡의 배경을 선택했던 춘향의 현실지향적 동기와 더불어 애이불비의 처연한 여성상이 아닌 신데렐라 언니의 송강숙을 떠올릴 정도의 억척스러움 또한 보여주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애끓는 이별 후 춘향과 월매는 오매불망 몽룡이 과거급제를 바라는 치성을 날마다 올린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과연 춘향이 아무 소식도 없이 세월만 흘러가는데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을 거냐는 의심을 가질 수도 있다. 모든 패러디 창작은 대상에 대한 의심부터 시작한다. 원전을 보면 춘향이 옥에 갇히고서야 방자편에 편지를 보내는데, 왜 그러기 전에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을까라는 의문부호를 찍는 데부터 방자전의 가능성을 더듬어볼 수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일절 소식이 없는 몽룡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춘향의 고초에 방자가 왜 그리 가슴 아파하며 머나먼 한양까지 편지를 전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겠냐는 의문을 가진다면 방자전에 대한 우호적인 해석이 좀 더 가능해진다. 관노가 사사로이 서신을 전하기 위해서 관아를 벗어나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추노를 일으킬 일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방자에게는 그렇게 목숨 걸 어떤 이유가 있었지 않았나 추측해볼 수 있다.

한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춘향에게 방자는 몽룡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의 통로이다. 또한 관아의 머슴인 방자를 통해서 혹시나 몽룡의 소식을 들을 수 없을까 자주 찾았을 수도 있다. 그런 과정에서 역시나 젊디 젊은 두 남녀에게 야릇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 게다가 김주혁 정도로 생긴 방자라면 몽룡과 상관없이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보자마자 첫날밤을 보낸 과감하고 개방적인 춘향이라면 그런 방자에게 기대서 몽룡에 대한 그리움을 채울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볼 수도 있다. 춘향이 몽룡을 만났을 때 나이 겨우 16살. 그리고 세월이 흘렀어도 스무살 정도였을 나이의 사랑은 불안하다.

사랑하던 남자가 군대가 있는 동안 고무신을 꺽어신는 많은 여자들을 욕하기 꺼려지는 것은 그 나이 때에는 유혹에 자기 마음을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직 자아가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에서 기다림에 지칠 때쯤의 다가오는 누군가의 손길에 그만 의탁하게 되는 일을 딱히 의리 없다 나무라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군대도 아니고 기약 없이 떠나간 몽룡을 기다리는 춘향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지 않을까?

항상 춘향집을 오갔던 방자라면 그런 춘향의 마음의 틈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사내라면 춘향 정도의 미인에 대한 욕심을 품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 방자전이 방자의 욕망을 동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개연성에 대한 공감을 얻고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몽룡과 방자 사이는 솔거노비가 아닌지라 오랜 충성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임한 관아의 머슴과 도련님 사이에 충성심이 있다면 그것은 억지일 뿐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소개된 영화내용만으로 유추해본다면 방자전이 대단한 역사의식이나 사회성으로 무장해서 소설 속 주인공들을 비틀었다기보다는 아주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춘향이 그토록 미인이었다면 신분상 차이가 없는 방자 혹은 누구라도 춘향을 마음에 두었을 것이고, 그것이 하필 방자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역발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방자의 욕망은 기존의 가치를 깨는 발칙하고 위험한 것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춘향을 모독했다고 발끈하는 것은 좀 아쉽다. 춘향에 강박된 시선이 아니라 영화 전반에 대한 비판이라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김대우 감독류의 영화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이 영화를 극장까지 가서 보게 될지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지만 세상에 아주 당연하게 여겨왔던 어떤 절대적 가치를 비튼 것에서 얻는 해방감이 방자전에 담겨져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당신이 알고 있는 춘향전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카피는 무리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거짓일 수도 있다’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상상의 여지를 두는 문장이었을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