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업실에서 만난 미술가 연미 ⓒ 안태호
연미 작가는 신문을 작품의 재료로 활용한다. 2005년 첫 개인전을 가진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명박 정부였다. 그는 2008년 촛불시위가 한창인 와중 <안전합니다>라는 주제로 청와대 앞에 있는 갤러리에서 게릴라 전시를 열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적으로 다룬 작품 탓이었을까. 청와대에서 전시작품 철거를 요구했다. 당연하게도 이 요구는 거부됐지만 갤러리는 순식간에 닭장차로 가려졌고, 그의 작업은 전경들이 가장 많이 관람하게 되는 기이한 운명을 겪었다. 2009년 그의 세 번째 개인전의 주제는 <시시한 폭력>. 역시 신문으로 작업한 작품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은 권위와 권력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미디어스에서 작가를 주목한 것도 미디어를 재료로 해 활동하는 ‘동종 업계’라는 점이 작용했다. 직접 만나본 작가는 생각과는 달리 그렇게 정치적이지도, 과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신문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세상에 대한 발언은 그의 말과는 달리 끈덕지고 집요했다. 인터뷰는 5월 19일, 작가의 작업실에서 진행됐다.

안태호 :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미술가 연미 : 뭐라 설명해야 하나... 탁구 치는 걸 좋아한다.(웃음) 작업을 하고 있고 2005년에 첫 개인전을 했다. 그때 처음 신문 작업을 했다. 여러 가지를 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신문이었다. 3년 전에 두 번째 개인전을 하고, 2년 전에 게릴라 전시처럼 <안전합니다> 전시를 했다. 일상적인 전시처럼 기획된 것은 아니고, 촛불이나 쇠고기문제에 대해 예술이 발언하기 위한 게릴라식 기획이었다. 청와대 근처 갤러리 관장님이 전시장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전시를 했다. 그런데, 사건이 그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별 걱정 없이 했는데, 작품 걸자마자 작품에 가장 관심 없던 계층들이 갑자기 관심을 가져서 놀랐다. 다음 해에 그 작업들을 좀 더 해서 세 번째 전시를 했다

안태호 : 작업실이 퍽 넓다

미술가 연미 : 세 명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데도 허리가 휜다. 작년부터 문래동을 가야 하나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볼까 생각중이다. 그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갈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그림을 가르치는 곳도 옛날 방식이 대부분이다. 자유롭게 그림그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해 보고 싶다

▲ 2008년 '안전합니다'전 작품

안태호 : <안전합니다> 전을 보면 촛불시위와 관련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최근 조선일보와 이명박 대통령의 촛불 2주년 평가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미술가 연미 : 특별히 촛불시위와 관련된 작업을 한 게 아니었다. 단지 사회에 대한 반응을 보여 온 작품 이기에 관련 안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치 자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내가 운동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이가 계속 들고 작업을 하면서 정치란 것이 결국 주변의 사소한 권력관계들의 확장이구나라고 느낀다.

청와대 앞의 전시도 그렇고, 촛불집회 당시에 느꼈던 게 있다. 정치는 모르고 평소에 체감도 못하는 데 그때는 체감한 거였다. 이명박이 당선되면서 멀리 있던 정치관계들이 나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구나 체감을 했다. 그 때, ‘공부를 해야 되는 거구나’라고 느꼈다. 이번에 조선일보 기사와 이명박 대통령의 말을 보면서, 나같이 정치에 깊이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그때 공부하고 반성했던 것들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걸 느꼈을 것 같다. 보수나 진보나 그런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보수가 뭔지 너무 궁금해지고 그런 게 있다.

처음 그 기사를 봤을 때는 욕 나왔다. 그 즈음에 작업하며 소리만 틀어놓은 영화가 기억난다. 주인공 여자가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상담을 받는다. 이야기를 몇 시간 동안 계속 하는데, 의사가 사실은 의사가 아니라 정신병 환자였다. 조선일보가 딱 그런 것 같다. 조선일보를 믿는 사람들이 그렇다. 가운을 입고 의사처럼 이야기하니까 당연히 의사라고 생각한다. 조선일보도 권위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이 비슷하다. 사람들이 무식해서라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타이틀 때문인 거다. 말하자면 치료받으러 왔기 때문에 의사를 판단하려는 의향도 없다. 영화에서는 의사가 직접 와서 의사를 가장한 환자에게 ‘왜 여기 있느냐’라고 이야기하며 결국 끌어낸다. 조선일보도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정치에 대해 잘 모른다? 작업과 작가의 삶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간격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렇지가 않다. 정치가 저 위에서 벌어지는 권력관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해관계 조정의 총합이라고 할 때, 이미 작가는 자신만의 정치성을 너끈히 확보한 사람이었다. 조선일보를 ‘의사를 가장한 정신병자’로 규정하는 부분에선 예술가 특유의 예리함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그럼, 조선일보도 작업 대상으로 삼을까?

미술가 연미 : 처음에는 조선일보를 보면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좋았다. 하고 싶은 게 샘솟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이상한 방식의 감정해소나 치우친 주관으로 가게 되어 조선일보를 잘 안 본다. 특정한 신문사가 아니라 신문 자체가 전달해주는 방식 자체에 거리를 두고 보려고 한다. 조선일보는 오히려 이를 방해한다. 술 먹고 뒷담화하기 좋지 작업에는 문제가 있다"

안태호 : 하하, 이거 재밌다. 조선일보는 감정이입이 되어 작업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야말로 일등신문의 굴욕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신문을 통해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뭘까.

미술가 연미 : 시작은 단순했다. 사회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작업할 때 자신한테만 몰입되어 있는 것을 벗어나고 싶었다. 신문이라는 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아는 데 있어서 손쉬운 매체다. 그래서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보면 계속 이야기가 나오는 거였다. 신문을 계속 보다보니 사진의 얼굴만 바뀌고 사건의 이름들만 바뀌고 같은 게 반복되는 이미지가 강했다. 사실의 전달보다는 사진의 이미지들이 전해주는 것이 더 많았다. 한편으론 신문이 권위적으로 느껴졌다. 배달될 때마다 중요한 사실이고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인 양 권위적으로 다가와서 부담스러워서 가볍게 아이들이 붙이는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권위를 없애야 신문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신문을 보면서도 필독서처럼 꼭 볼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 권위를 인정하기 싫었고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일방적으로 발행되는 거니까, 어딘가에서 발행된 것을 내가 덧붙인 것을 혼자한테 재발행하는 거다. 무겁게 다가왔다면 유머로 보이게끔 해서 재발행 하는 거다. 어찌 보면 댓글일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하나의 ‘반응’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어떤 기사나 이미지들에 대해 나의 의견이나 주장이 이런 게 아니라 반응이 이렇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주관을 객관화시키고 싶은 거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사건을 봤을 때 공포감이 들었다면 그걸 가지고 작업을 하는 거다. 공포의 책임을 묻는 게 아니다

▲ 2009년 '시시한 폭력'전 작품 '갈망 - 신문광고 꼴라주'

신문의 권위에 균열을 내는 작업이라... 마치 예전 안티조선 운동의 구호를 보는 듯하다. 한때 안티조선 운동의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는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였다. 연미 작가는 그것을 신문 일반으로 삼아 작업을 진행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그의 작품은 신문의 허를 찌르는 듯한 내용들이 많다. 신문에 나온 활자들에 연필로 가필을 해 조금만 거리를 두면 마치 아랍신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거나, 최초의 우주인 탄생을 기념한 대기업 광고에 실린 로켓 사진에 ‘조선’이라는 빨간색 딱지를 붙이거나 하는 식이다. 전자가 신문에 나오는 참혹한 사건사고에 심드렁해지는 독자들의 심정을 심리적으로 가장 먼 아랍어에 대비시켜 표현했다면, 후자는 온 나라가 경축하는 우주인 탄생을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연계시켜 의미를 흐뜨려놓는다. 이쯤해서 궁금해진다. 이 작가, 신문은 몇 개나 볼까?

미술가 연미 : 경향신문, 매일경제, 중앙일보 3개의 신문을 구독한다. 신문사에 메일도 보내봤지만 공짜로 보내주는 곳은 없더라.(웃음) 내 돈으로 주고 구독한다니까 조중동은 싫었다. 그래서 경향신문을 처음에 선택했다. 매일경제는 전문지라서 봤다. 경제라는 것과 밀접할 것 같아서. 중앙일보는 솔직히 사은품 때문에 봤다. 그런데 판형이 작아서 작업하기에 곤란했다. 규격을 맞추고 싶었는데 사이즈가 작아지니 이미지도 작아졌다. 주로 이 세 개의 신문으로 작업을 한다. 큰 사건이 있거나 이미지가 더 필요한 경우에는 별도로 다른 신문들을 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중앙일보는 경품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다양한 이미지와 형태를 얻기 위해 진보-보수-전문지의 삼각체계를 구축해 놓았다는 이야기 되겠다. 혹시, 이 기사를 보게 되실 일간지 편집부 관계자 계시면, 연미 작가에 대한 신문 후원을 고려해보시라 권해드리고 싶다.

안태호 : 신문을 정말 열심히 볼 것 같다. 작업할 ‘꺼리’가 너무 많아 고민스럽지는 않나?

미술가 연미 : 신문을 꼼꼼히 보는 편은 아니다. 대략적으로 훑어본다. 옛날 것을 쭈욱 넘겨 보기도 한다. 그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하나씩 정독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사실 작업할 대상이 너무 많다. 너무 많기도 한데, ‘많다’라는 것은 심리적인 부분이다. 신문을 보다 보면 다양하지는 않다. 같은 기사나 같은 포맷의 사진 각도라든지, 사진이 대상을 다루는 방식이나 편집방식도 그렇다. 기사 자체의 내용을 떠나서 보더라도 편집을 보면 전체 내용이 전달되는 측면이 있다. 사진이 줄어든다든지 키워진다든지 배치가 달라진다든지. 타이틀을 보며 개괄할 때 그런 것들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안태호 : 신문 작업하면서 본인의 변화가 있었나?

미술가 연미 : 살아가면서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신문작업에 드러나길 바라는 것 같다. 신문작업을 하면서 변한 것은 작가적인 태도에 대한 확신인 것 같다. 그 전에 요구받은 적이 없다면 지금은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게 된다. 젊은, 대한민국의, 30대, 가난한 여성작가가 사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보여주려는 태도 자체가 작가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안태호 : 표현의 자유 문제에 대해 남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미술가 연미 : 좀 어려운 문제다. 그 질문이 제일 어렵다. 제도적이나 제도적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이나 검열, 심지어 자기검열까지 있게 된다. 사람들이 경계가 없는 것, 경계가 불분명한 것들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표현의 자유는 우선 자신 안에서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자신 안에서부터 자유권리를 찾을 의지를 가져야하는 것 같다

‘시시한 폭력’ 전시를 하면서 여러 가지 반응이 있었다. 예를 들어 4,50대 남자들의 경우 정치에 관심이 강한 분들은 작업이 너무 약하다고 비판한다. 여자 분들은 재밌다, 접근이 쉽다고 이야기한다. 미술계에서는 내가 운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운동을 하는 분들은 뭔가 적극적으로 운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예술 쪽에 기울었다고 생각한다. 극과 극이 있으니 중간이 있는 거다. 좌우가 없으면 중간도 없다. 포지션이라는 것도 계속 변화한다. 정치나 사회를 보는 중간입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회가 너무 부글부글 끓다보니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입장을 분명히 표현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위치에서 그런 반응들을 보여주게 된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경계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자기표현을 계속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표현이 뭉칠 때도 있고, 흐를 때도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게 애매한데,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고 계속 말하는 것 같다.

미술계와 운동계(?) 사이의 관점의 괴리가 매우 흥미롭다. 그는 말하자면 중간계를 개척한 셈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 문제에 있어서 얻고 싶은 답을 듣지 못했다. 사실, 청와대에서 전시철거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면, 그에 대한 반발심리가 매우 컸을 텐데 그렇지 않았던 걸까. 다시 안전합니다 전시의 해프닝을 상기하는 질문을 던졌더니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 연미 미술가의 작품 '광고'
미술가 연미 : 당황은 했는데, 화가 나진 않았다. 당시 내 작업을 제일 많이 본 사람들이 전경들이었다. (청와대 요구라든가, 경찰들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런 부분은 있었지만 전시가 오히려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시장에서 전시라는 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관람을 많이 해서 작가로서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다. 보여줘야 하는 것들, 표현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이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들이 작업하는 작가로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느꼈다. 표현의 자유도 그 지점에서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니까 표현의 자유를 찾아가야 하는 문제, 자기 권리를 찾아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그러니까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외부의 강제로 인한 부자유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표현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통용되는 표현의 자유와는 궤를 달리하지만 독특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예술가의 자의식이 물씬 묻어나는 지점이다.

안태호 :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힘이 있는 것을 쳐서 빼앗는 게 아니라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전략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작품과 연계해 좀 더 설명한다면?

미술가 연미 : 전략이라는 말은 쓴 적은 없지만...작업하면서 알았다. 그걸 의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작업하면서 알게 된 거다. 반응이다. ‘조선일보 엿 먹여야지’라는 생각에서 그런 것도 아니고, ‘사회 부조리를 밝혀야지’라며 한 것도 아니다. 계속 힘이 힘을 치고 있는 상황이 미디어에 드러난다. 나 같이 힘 없는 사람은 그 판에 끼어들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술수를 쓰는 것도 아니다. 힘 센 애가 있으면 죽자고 덤벼 싸우고 싶지도 않고 뒤로 돌아가서 무릎을 쳐서 힘의 균형을 깨서 스스로 쓰러지게 하고 싶다. 그런데 주로 남자들이 싫어했다. ‘정면대결을 안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런 방식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토끼가 호랑이와 정면으로 맞짱 뜨는 게 용감한 게 아니라 호랑이와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강자라고 생각한다. 남성적인 권력대결의 양상을 싫어했다. 그런 점에서 이 작업을 했던 것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왜 신문을 비웃을 수 없는가. 왜 사안을 정확하게 이성적인 판단과 논리적인 반격으로만 받아들여야 하나. 그냥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는 거다. 미국산 소고기? 그냥 먹기 싫은 거다. 출산율 적어진 것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권익을 위해 무엇을 해 달라 한들, 변하는 게 없고 힘드니까 애를 안 낳는 거다. 그렇게 자기 욕구나 자기 방식에 맞춰 자기 욕망을 표현할 때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변할 것이다.

싸움의 방식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한 가지 방식만으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도그마가 싸움을 지루하고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 세상이 이미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무젓가락 갈라지듯 나뉘는 세상이 아닌 바에야 싸움의 방식은 다채로울 수록 좋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말은 자칫 허무한 주장이 될 수도 있지만, 실제 작게나마 저항을 조직하고 있는 이의 말은 그만큼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의 작업은 언젠가 여성학자 정희진이 이야기한 가부장제 공략법과 일치한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라는 전략을 제시한 바 있다. 가부장제를 무너뜨리려 맹렬히 공격하는 것보다, 가부장제 자체가 얼마나 후진 시스템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더 효율적인 공략법이라는 이야기다.

▲ 2008년 작품 '왠지 통할 것 같다'

안태호 : 미술시장이 몇 년 전에 비해 한 풀 꺾이긴 했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작품판매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 같다

미술가 연미 : 일전에 이명박과 이건희가 악수하고 있는 작품을 판매한 적이 있다. 어떤 돈 많은 사장님이 사셨다. ‘권력과 금력은 통한다’며 아주 맘에 들어 하면서 사갔다. 내 의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재밌었다. 신문 작업은 판매할 생각이 없다. 팔 생각이 없다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신문을 택한 것과 통한다. 작업의 재료로 신문을 선택한 것 중의 하나가 재질이 느껴진다는 거다. 뉴스나 사건들을 볼 때 인터넷에서는 정보로서 접하고 해석하고 느끼는데, 신문은 편집된 것과 이미지, 종이의 질감으로 인해 피부로 체감되는 게 있다. 그때 느꼈던 반응이라든지, 그날 뉴스의 시각성이 신문에는 남아있다. 종이가 변하고 시간이 지나고 거기에 작업을 했을 때, 사건에 대한 반응이 그 순간에만 될 수 있는 거라서. 그것을 남기고 싶은 게 있다.

안 팔겠다고 생각한 것 중 하나가 미술작품들은 잘 파는 작가들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밖에 없다는 게 속이 쓰리다. 한 때, 미술시장이 좋았고 지금은 주춤했다. 미술품을 투자가치로 사는 게 많고, 인테리어용으로 사는 게 많다. 그런 점에서 내 작품은 둘 다 해당이 안 된다. 보관상의 문제도 있다. 부서지거나 부스러진다. 인테리어 하기에는 운동권이나 반정부 마인드가 있다 해도 집에 그걸 걸어놓고 싶어 하진 않을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맞추려 하면 어차피 힘들게 사는데 더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다.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능력을 키워 벌 수 있으면 벌 생각이다. 지금은 아이들도 가르치고 알바도 해서 벌고 있다. 물론, 정말 먹고 살 일이 너무 힘들면 팔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시에서 여성전용 ‘핑크택시’를 도입한다고 해서 택시 면허증을 딸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많은 작가들이 예술가는 예술활동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연미 작가는 작업과 생계를 구분지어 생각하고 있었다. 글쎄, 이것을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지 가슴아프다고 해야 할지 잘 판단이 서질 않는다. 분명 개인의 선택이 우선하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예술정책과 예술계 풍토, 한국의 문화적 토양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작품을 팔 수도 있다는 작가의 말은 역시 짧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자신이 가장 에너지를 쏟는 일에서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만큼 고된 일이 있겠는가. 길지 않은 인터뷰를 마치며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어, 근데 꼰대 이야기가 나오네?

▲ 연미 미술가 ⓒ 안태호

미술가 연미 : 나는 진짜 꼰대들을 사랑하고 싶다. 그런데 꼰대들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잘 모르겠다. 사랑까진 몰라도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 아닌가. 못 본 척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그런 걸 가르쳐 주는 데가 없는 것 같다. 형용모순이긴 하지만, 멋진 꼰대가 많았으면 한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기 삶에 대해 권리와 권력을 행사하려는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영원불멸의 작품을 남기려고 작업하는 것은 아니다. 내 작업이 하나의 반응이나 태도로써 보여주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 것들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한 마디로, 자기 삶에 대해 권리와 권력을 긍정적으로 행사하는 사람의 하나로,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가겠다는 선언이다. 꼰대들은... 나도 사랑하고 싶다. 맞다, 그런데 방법을 알려주는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미술가 연미는 2009년 ‘시시한 폭력’ 전의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작업으로 나와 세상이, 나와 타인이 어떤 위치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지 주시하고 있다. 이것은 삶에 대한 표현이지 그 어떤 의식적 주장의 표현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의식화된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삶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의 작품이 그가 지향하고 있는 방향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업이 운동도 아니고 미술도 아닌 무엇이 아니라, 사회적 비판을 거둬들이지 않으면서도 예술의 자리를 지켜내는, 경계를 넓히는 작업으로 오래도록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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