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꾼다. 31년 전 1월엔 영화 <1987>을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재연된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있었다. 2017년 12월부터 이어지고 있는 영화의 흥행을 통해,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이 사건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다.

영화 개봉 이후 한국 사회 일각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보면 어째서 이러한 영화가 이제야 우리에게 당도했는지를 알 것 같다. 자유한국당 일각에선 영화를 보고 문재인 대통령이 우는 것조차 못마땅해하는 발언이 나왔다.

곽상도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9일 “어제 문재인 대통령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을 보고 울었다는 기사만 나온다. 그걸 누가 밝혔나? 우리 보수정권이 밝혔다. 대통령이 왜 우느냐.”라고 말한 바 있다. 같은 날 김성태 원내대표 역시 “1987년은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로 이어지는 역사의 중요한 결절 지점이자 역사적 자산이다. 영화를 관람하면서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을 연출하며, 이 영화가 자신들의 영화인 것처럼 포장해야 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역사적 사건과 영화가 다루는 보편적인 가치에 호응하기보다, ‘86세대-민주화운동 세력-민주당 정치인들’로 이어지는 고리를 지적하고 이를 차단하는 데에 골몰했다. 가치판단을 내리기 전에 실리적으로도 황당한 태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소 미묘한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이 동아일보다. 동아일보는 의인화하자면 1987년에 대한 향수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부터 2018년 1월에 이르기까지 영화 <1987>을 동아일보 지면과 채널A 방송에서 조망하고 있다.

급기야 2017년 12월 31일 미디어오늘에선 <현재 동아일보, 영화 ‘1987’ 숟가락 얹을 자격 있나 - [비평] ‘1987’ 소개하며 “동아의 기자정신” 치켜세우지만 오늘날 동아와는 거리 멀어>라는 제목의 비평기사까지 냈다. 현재의 동아일보는 1987년 당시의 동아일보와 다르며, 이 영화를 통해 자신들을 홍보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다.

동아일보 2018년 1월 8일자 2면 캡처

그러나 이후에도 동아일보의 보도는 멈추지 않았다. 2018년 1월 8일엔 박종철의 친형인 박종부씨의 인터뷰가 실렸다. < “1면에 대문짝만한 ‘물고문’ 제목… 동아의 용기가 민주화 앞당겨” - [나와 동아일보]<10> ‘서울대생 고문치사’ 박종철 형 박종부 씨>란 제목으로 실린 이 인터뷰에서 박종부 씨는 31년 전 기억을 되짚었다.

“(...) 동아일보의 1월 19일자 보도는 한 줄기 빛이었다. 그 전에 나온 동아일보도 찾아봤다. 1월 16일자 사회면 중간톱 기사 ‘대학생 경찰 조사 받다 사망’부터 시작해 연일 종철이의 사망 원인을 추적하는 보도를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동아일보를 보며 나와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는 유족인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사회 전체가 공권력에 무참하게 짓밟히던 시절 동아일보는 신뢰할 수 있었다.

(...) 동아일보 보도로 당시 검찰은 수사를 4번이나 했다. 최초 적발된 고문 경찰관 2명에 대한 1차 수사, 고문 가담자 경찰관 3명에 대한 2차 수사, 박처원 대공수사처장 등 은폐 및 조작을 지휘한 경찰 수뇌부에 대한 3차 수사를 모두 동아일보가 끌어냈다. 그 결과 이듬해 강민창 치안본부장에 대한 4차 수사가 벌어졌다. 동아일보는 1988년 1월 14일자 ‘검찰도 수사 대상이다’라는 제목의 보도로 엄정한 진상규명을 채찍질했다.

민주화는 종철이의 죽음이 없었더라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종철이의 희생이 민주화를 앞당긴 것은 분명하다. 동아일보의 보도 역시 마찬가지다. ‘물고문 도중 질식사’ 기사가 없었다면 민주화는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동아일보가 ‘숟가락’을 얹는 것을 타박했던 미디어오늘이지만 2008년 1월 11일엔 1987년 1월 동아일보에 박종철의 죽음에 대한 칼럼을 썼던 김중배 당시 논설위원을 인터뷰했다.

물론 숟가락을 얹는 것을 비판했던 작년 말 글에도 김중배는 등장한다. 김중배는 1991년 사주의 압력으로 동아일보를 떠나게 된다. 그런 사건들을 포함하여 미디어오늘은 지금의 동아일보가 그때와는 사뭇 멀다고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디어오늘이 기술할 수 있는 당시 동아일보의 활약을 정작 동아일보가 소개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이상하고 어색한 일이다. 지금의 동아일보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그 정도는 동아일보의 권리로 봐주는 게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1987' 포스터

‘많이 변했다’고 말을 하고 일리가 있지만, 1987년 당시의 동아일보였다고 순결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광고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백 명이 넘는 기자를 해고했던 적이 있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이부영 전 의원은 그때 동아일보를 떠난 해직기자 출신, 소위 ‘동아투위’의 멤버였다.

1987년 민주항쟁이나 2016년 대규모 촛불 광장시위처럼 전 국민이 참지 못해 들고 일어나는 상황에선 당연히 별별 사람들이 다 참여한다. 어제까지 정부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이건 아니다’라며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다.

2016년 촛불시위 정국 내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찬성/반대 비율은 ‘80% vs 15%’ 정도였다. 2012년 대선의 투표율은 78%에 달했고, 박근혜는 과반 지지를 얻고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어림잡아 유권자의 40%의 지지는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산술적으로 아무리 적게 잡아도 ‘80% 촛불지지파’ 중 20%, 그러니까 1/4 정도는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다.

무당파 등을 고려한다면, ‘80% 촛불지지파’ 중 민주당 및 그 왼쪽 정당들을 지지하는 이들의 비율도 35~40% 정도였을 것이다. ‘촛불민심’을 말하는 이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촛불민심엔 진보적 민심 뿐만 아니라 보수적 민심도 상당량 섞여 있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조선일보(주로 TV조선이었지만), 중앙일보(주로 JTBC였지만)와 한겨레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국면이었다. 그 과정에서 동아일보와 채널A라고 반동적이지는 않았다. 태블리PC 정국 이후엔 거의 모든 언론이 합작했다.

1987년의 상황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다수 시민이 봉기하는 상황에선 민주화운동 세력의 입장만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문서화되지 않았지만 훨씬 넓은 영역의 민심을 점유했을 여러 다른 결의 생각들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묘사한 최환 검사의 경우 공안검사였으며, 그전에는 학생 운동권들을 잡아넣던 검사였다.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과거 썰전에 출연해서 최환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한 바 있다. 영화에서도 하정우가 연기한 최 검사가 화염병을 던지다 잡혀온 학생의 뒷통수를 때리는 장면을 집어넣어 그 점을 완곡하게나마 표현하기는 했다.

역시 영화에 등장하는 교도관 안유의 경우 심지어 1987년 이후 상황이었던 1990년대 제소자에 대한 인권유린을 일삼았던 사람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1990년대에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복역했던 강용주 진실의힘 재단 이사는 안유가 자신에게 전향을 강요하며 독방에 가두고 손을 묶고 개밥(손을 뒤로 묶은 채 입을 대고 밥을 먹게 하는 징벌)을 먹이는 고문가해자였다고 고발하면서 영화를 보이콧하고 있다.

한국은 총체적으로 과거사 대면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회라는 문제가 있지만, 이런 사례들에 비한다면 동아일보의 악업이란 것은 다소 사소해 보이기도 한다. 폭압적인 독재체제에서 반독재운동을 한 이들이 민주화 이후 보수파가 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전향’이라기보다는 ‘분화’인지도 모른다.

다시 2016년의 여론지형도와 1987년의 상황을 포개보자. 2016년에 비해 경찰 진압이 엄중했던 그 시절에 그 정도 규모의 시위대가 튀어나왔다면, 당시도 여론지형도는 ‘80% vs 15%’에 비슷했을 것이다. 이 말인즉슨 ‘호헌철폐 독재타도’에 동의한 이들 중 이후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 이들도 꽤 있었을 거란 뜻이다. 흔히 사람들은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지지율 합인 55%만을 보지만, 노태우에게 표를 던진 이들 중에서도 ‘더 이상 고문은 안 된다’, ‘체육관에서 대통령 또 뽑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1987년 당시의 동아일보는 ‘1987’의 일원이었고, 그것도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이들이 맞다. 민주화 이후 그들이 보수화되었다 한들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그 공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동아일보가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야당지에서 김대중 정부 정권교체 이후에도 야당지로 위치를 바꾼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 역시 별개의 일이다.

2017년 3월 17일 열린 동아투위 결성 42주년 기념식(언론노조)

사실 동아일보의 ‘추억팔이’엔 다소 짠한 부분이 있다. 수십 년 동안 재벌언론의 태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동아일보보다 훨씬 권력에 순치된 언론이었던 중앙일보를 바라보는 동아일보의 심정은 어떨까? 오늘날 중앙일보는 중도파들에게 동아일보보다 훨씬 합리적인 언론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의인화했을 때 중앙일보의 자식이라 할 수 있는 JTBC가 개혁 성향 시민들에게 각광받는 현실까지 생각한다면? 옛날 얘기하면서 ‘니 뭐 알고 그러냐’라는 ‘꼰대질’로 넘어가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의인화되기 전 현실에선 실제로 JTBC 붙들고 하는 얘기도 아니고 그저 지면과 방송에서 하는 얘기니 의인화해서 생각하는 것만큼의 민폐도 아니다.

그러니 진보적 시민들이 이 부분에서 동아일보를 너무 야박하게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한국은 총체적으로 과거사 대면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회'라는 문제 때문에, 동아일보에게 한 가지만을 주문하고 싶다.

이제 그만 ‘해직기자’들을 지면에서라도 동아일보 출신으로 품어주시라. 1987년의 역사를 얘기할 때 이부영 전 의원도 동아일보 출신으로 소개하고, ‘불행한 사건으로 동아일보를 떠났다’라는 애매모호한 말로라도 동아투위의 존재를 살려주시라.

지금과 사뭇 달랐던 1987년에서조차 동아일보는 자사 보도에서 동아투위 출신인 송건호와 박권상이 동아일보 출신임을 알리지 못했다. 1987년 당시 그들이 참석한 재판 내용을 기사로 상세하게 기술하면서도 송건호는 ‘민언협 초대 의장’으로, 박권상은 ‘자유기고가’로 표기했다.

사주의 치부를 드러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또 수십 년이 지났다. 어차피 신문산업 전체가 황혼에 이르렀다. 9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언론이, 언제 퇴장할지 모르는 처지로, 그 정도 품격은 보여줄 때가 됐다고 본다. 그래야 시민들도 동아일보의 ‘추억팔이’를 덜 고깝게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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