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생물이라고 했고 민심은 또 천심이라고 했다. 이 말들에는 정치와 여론의 관계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변화하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던 정치적 현상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이러한 변화는 대개 요동치는 민심으로 표면화 된다. ‘천심’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불가지성(不可知性)이다. 한낱 사람의 입장에선 도저히 예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사람은 천심을 그저 따를 뿐이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굳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 드러나는 지지율은 말하자면 나무토막을 이용한 게임인 젱가(zenga)에 비유할 수 있다. 높게 쌓여있는 나무토막을 몇 개 빼내는 정도로는 탑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무너지기 전 마지막 한 토막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는 바로 그 순간이 게임의 승패를 가른다. 여론조사가 드러내는 지지율에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이유다.

16일 하루 동안 벌어진 상황을 보면 적어도 문재인 정권의 기반을 이루는 나무토막들이 유실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날 오전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했다. 아침 시사라디오 프로그램에 경제부총리가 직접 출연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 프로그램이 파격과 어떤 자유분방함을 지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언론이 아무리 ‘김동연 패싱’을 써도 그가 경제부총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경제부처 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이 나와 내놓은 메시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김동연 부총리는 이 방송에서 가상화폐, 부동산 정책, 최저임금 인상, 다스 비상장 주식 물납 과정 및 실소유주 관련 의혹 등에 대해 언급했다. 다소 정무적 성격이 강한 마지막 주제를 제외하면 최근 경제 분야와 관련한 핵심 현안들이 망라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후 중소.벤처기업 및 소상공인과의 대화를 하기 위해 청와대 본관에 입장하고 있다. 왼쪽은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오른쪽은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연합뉴스)

이 주제들은 보수언론의 주요한 공격 포인트이기도 하다. 특히 조선일보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조선일보는 연일 가상화폐 관련 정부의 정책 혼선을 지적하며 판 키우기에 나서는가 하면 최저임금 인상의 역효과에 대한 꾸준하고도 집요한 문제제기를 이어가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대책이 강남에 집을 갖고 있는 관료들에 의한 ‘내로남불’격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앞뒤가 없는 논리를 들이밀기도 한다.

보수언론이 이렇게 나오는 건 이 대목이 지방선거를 앞둔 문재인 정권 입장에서 가장 아플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상화폐 문제는 2~30대 여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부동산 정책은 수도권의 중장년층 여론을 좌우한다. 최저임금 인상은 어디까지나 대기업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현 정권에 우호적일 가능성이 큰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인들의 여론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김동연 부총리의 라디오 방송 출연이 과연 불을 진화했는지 더 키웠는지는 따로 평가 할 문제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황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날 교육부는 유치원 어린이집 영어교육금지 정책을 사실상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본적인 정책 판단은 변함이 없지만 향후 1년 간 운영 기준 등을 만들고 현장의 여러 부조리와 부작용을 제거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17일 조간신문들은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설익은 정책실험을 강행하다 역풍을 맞았다며 일제히 비판 사설을 내놨다.

이런 종류의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더 폭넓은 여론수렴과 섬세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사태의 배경이 과연 그것에만 있는지는 의문이다. 단적인 예로 유치원 어린이집 영어교육금지 정책의 가장 중요한 반대논리가 “3만원짜리 영어수업을 막아 수십만원짜리 사교육을 부추긴다”라는 게 그렇다. 이는 유아교육까지 입시화 되어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일명 영어유치원으로 시작해서 사립초등학교-국제학교-해외 명문대 입학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가 이미 형성돼있다는 게 세간의 인식이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엇나갈 확률이 큰 사춘기가 유일한 역전의 찬스라는 농담까지 나오는 판이다.

이 문제에 가장 민감한 계층은 3~40대 여성이다. 최근까지의 사례로 보면 이 계층은 과거 보수정부의 정책 실패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세력을 선호하는 특성을 드러내왔다. 이런 면에서 보면 교육부의 정책적 선회는 앞서의 다른 사례들과 마찬가지 성격의 정무적 판단이 일부 개입된 결과일 것이다. 영어교육금지 정책을 아예 철회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1년 유예하겠다는 입장인 걸 보면 더욱 그렇다.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연합뉴스)

지금까지 언급한 사례들의 공통점은 현 정부 지지층의 경제적 기반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들이 박근혜 정권의 실정에 분노해 촛불을 들고 탄핵을 주장한 것은 상식의 차원이다. 그런데 무리해서 거액을 물려 놓은 가상화폐 거래소가 갑자기 없어진다거나, 집값이 떨어진다거나, 포기할 수 없는 유아 영어 교육에 몇 배의 돈을 써야 하는 일이 현실이 되는 것은 이해관계의 문제이다.

헬조선 자본주의에서는 언제나 이해관계가 상식을 압도해왔다. 오히려 상식이 이해관계를 포장하는 냉소적 도구가 돼온 게 사실이다. 보수세력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는 이 구도에 ‘종북’이라는 키워드를 하나 더 얹었다. 지난 16일 김대중 고문은 조선일보 지면 칼럼에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촛불의 위세를 몰아 헌법도 바꾸고 사회·문화·교육 등 제반 분야의 제도도 다 바꾸는 데 혈안이 되고 있다. 북한과의 대화에 집착한 문 정부는 북한이 하자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면서 “‘이건 촛불의 명령이 아니잖아’라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문(文) 열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썼는데, 이게 그 얘기다.

조선일보와의 찰떡궁합을 과시하는 자유한국당도 좀 더 적극적인 태도로 변화하고 있다. 관제개헌을 반대한다며 장외투쟁을 불사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권력구조 개편과 선거구제 개편을 연동한 ‘패키지딜’을 제안하는 성동격서식 전술이 대표적이다. 정부와 여당이 던지는 개헌 대 반-개헌 프레임을 무력화하고 야권을 하나로 묶어 보려는 시도이다.

물론 이런 여러 시도들이 당장 지방선거에서 위력을 발휘하긴 어려울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과거에 정부를 운영한 경험도 있고 여전히 지지층은 단단히 뭉쳐있기 때문에 당장의 위기를 현명하게 풀어나갈 여러 수단을 갖추고 있는 게 사실이다. 위기는 그것을 인식하는 한에는 위기가 아니라는 말도 있다.

문제는 정권 후반기에 치러질 총선과 대선이다. 이해관계가 상식을 압도하는 한국 사회의 근본을 바꾸는 시도를 하지 않으면 실패는 반복될 것이다. 공동체의 근본을 바꾸는 시도에 누가 어떻게 나서고 있는가가 중요한데 지금 정치권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눈앞의 성적표가 아니라 바로 그 점이 가장 문제이다. 지금부터라도 대비를 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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