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이재국 기자가 개인 블로그 '철없는 기자의 세상만평' (blog.daum.net/nostalgialee)에 쓴 글을 허락 하에 전재한다. 이 기자는 2003~2004년 전국언론노조 신문개혁특위 위원장으로 일했고 현재는 한국기자협회 경향신문 지회장을 맡고 있다. <편집자주>

또 '고름'인가. 도대체 KBS엔 얼마나 많은 이따위 류의 인간같지 않은 者들이 또 있는 걸까. 그래, 빼앗겼던 정권을 되찾는 것은 확실해졌으니 도처에서 혈세를 축내고 있던 '양심적 KBS 언론인'이 남들보다 먼저 한 자리를 챙기기 위해, 눈도장을 받기 위해서라도 봄볕에 벼룩처럼 쏟아져 나오기도 하겠구나.

가끔은 분노를, 내 심정 그대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점잖게 쓰는게 정말 '예의'가 아니다 싶은 그런 때가 있다. 물론 자주 있으면 안되겠지만.

KBS 차갑진 시청자센터장이 지난 12일 기자회견을 열어 보직 사퇴와 함께 정연주 사장의 편파 방송과 적자 경영을 성토했다는 기사를 접하고선 진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문사의 국제부 기자가 오지랖 넓게 이런 일에 왜 신경을 쓰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갈 일은 아니다 싶다. 아닌 것은 아닌 게다. 감정대로 할련다.

솔직히 보직을 내던진 차갑진을 'KBS내 의로운 인물'로 다룬 동아일보의 12월 13일자 8면 관련 기사를 보면서 참 많이 보던 시츄에이션이다 싶었다. 정년을 6개월밖에 남겨두지 않았다는 그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방송연설 녹화를 위해 KBS를 찾을 때마다 녹화 현장에 나타나 이 후보를 '알현'하고 "자연스럽게 하시라"는 등의 조언도 아끼지않은 행태로 노동조합이 "정치권에 줄대려는 인사는 KBS를 떠나라"는 비판 성명을 내게 했다. 근데 그런 사실은 동아일보 기사에선 단 한 줄도,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의인의 양심선언 다루듯 했다.

▲ 동아일보 12월 13일자
언론인 이름 달고 정치권 줄대기나 준정치인 활동 - 내부로부터의 경고와 질타 - 양심선언 가장한 KBS 비판으로 완전 커밍아웃 - 입맛대로 KBS 비판과 '의로운 내부고발자' 부각시키는 족벌수구신문 보도 - 한나라당에서 한자리 챙겨주기.

나는 차갑진의 행태에서 강동순을 보았다. 그리고 더 멀리는 김형태를 떠올렸다. 차갑진의 이번 파렴치한 행태를 단지 그의 문제요, 일회적 문제로 여겨지지가 않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두 사람이 누구인지, 왜 차갑진에게서 두 사람을 떠올렸는지 말해야겠다. 그리고 KBS 노동조합을 비롯한 구성원들에게도 쓴 소리도 해야겠다.

먼저 '고름' 얘기다. 2007년 5월 21일 국회에선 '강동순·유승민 녹취록을 통해서 본 한나라당 방송장악 실태와 대책'을 다루는 토론회가 열렸다. KBS 감사출신의 방송위원회 강동순 상임위원(한나라당 추천몫)이 2006년 11월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 KBS 윤명식 당시 심의위원 등과 함께 "정권을 찾아오면 방송계는 하얀 백지에 새로 그려야 된다"는 등의 문제 발언들, '좌파정권'인 현 정권의 몰락을 위해 국가신인도가 떨어져도 좋다는 식의 극언을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마련된 자리였다.

당시 토론회에서 양승동 KBS PD협회장은 "대선을 앞두고 잘못된 줄서기 등을 계속해 왔지만 방송인들은 앞으로 객관적으로 형평성에 맞는 방송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할 것"이라며 "문제의 핵심은 '불건전한 조직문화'이기에 강동순, 윤명식 두 사람만 두들기다보면 오히려 이런 문화의 확산을 막지 못할 것이다. KBS 스스로가 건강하지 못하면 이들 같은 '고름'은 계속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난 당시 미국 연수 중이었기에 한국으로 돌아온 8월에야 언론 보도를 통해 이같은 내용을 접했다. 당시 호남과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비하 등 녹취록에 담겼던 내용들이 술자리 참석 인사들의 정신연령을 의심케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고 파문이 컸기에 이 자리에서 시시콜콜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강동순의 KBS 감사 당시 행적에 대해선 언급하고 지나가야겠다. 그는 차갑진과 같은 KBS PD출신이다. 지난해 KBS 감사를 맡고 있으면서 수시로 사장 선임방식과 KBS 프로그램의 공정성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 조·중·동과 월간조선 등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KBS PD협회와 기자협회 등 후배들은 "5공시절을 포함해 33년간 KBS에 몸담아온 그는 감사로 재직하면서 극우 신문과의 악의적 인터뷰, 한나라당에 감사자료 유출 의혹 등 각종 치졸한 방법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을 욕보여왔다"며 "KBS가 불공정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사치스러울 정도로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5공시절에 PD생활을 했던 그 자신은 어떤 시대정신과 정의에 집착했었는지도 묻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반문하기도 했다.

후배들이나 시민단체가 비난하건 말건 수구보수세력들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은 강동순은 결국 예정된(?)대로 한나라당 추천 몫의 방송위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난해 6월 강동순의 방송위원 내정설에 KBS내 각종 직능단체들은 물론 언론노조와 언론운동단체 등 한목소리로 반대했지만 그는 한나라당의 든든한 후원속에 '전리품'을 챙겼다.

돌이켜보면 '강동순의 방송위 진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겠다'고 했던, 녹취록 파문 당시 305개 방송·시민·언론운동 단체들이 강동순 사퇴 공대위까지 출범시키며 "강씨가 국민 앞에 사죄하고 물러날 때까지 끝장투쟁을 하겠다"고 했던 몸부림들이 결국 두번 다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언론을 팔아, 양심을 팔아 권력을 탐하는 파렴치범들의 집요함은 갈수록 강고해지지만 언필칭 이 땅의 상식을 지키고자 하는 세력들은 지독하지도, 진짜 끝장을 보려하지도 않는 적당주의에 익숙해져있기에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2007 대한민국의 몰상식'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 역시 예외도 아니고.

▲ '강동순 방송위원 사퇴를 위한 공대위' 소속 언론단체들의 지난 4월 피켓 시위 모습 ⓒ언론연대
난 지금도 강동순이 버젓이 한국의 방송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방송위원입네 하고 활동하는 것에 욕찌기를 느낀다. 사악함을 심판하지 못하는 현실, 이러니 우리 언론도 정상이 아닌게다.

한때 같은 정치부 기자로 일선 취재현장에서 만나기도 했던 김형태 전 KBS 시청자센터 주간 얘기를 해야겠다. 그러고보니 2003년 10월 정연주 사장체제의 KBS를 비판하며 사표를 내고 정치권으로 향했던 그의 보직 역시 차갑진과 마찬가지로 시청자센터의 최고 책임자다. 아니, 가만히 보니 강동순이 지난 5월 녹취록 파문 당시 내놓으라는 방송위원 자리를 내놓지않고 슬그머니 물러난 것이 방송위 산하 시청자불만처리위원회 위원장직이네.

도대체 KBS와 방송위원회는 시청자를 뭘로 보기에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 '무늬만 언론인'들을 시청자 관련 기구의 장으로 앉혀놓았더란 말인가.

옆길로 샐려면 한참 갈 수도 있겠지만 다시 원위치. 김형태는 2003년 10월 16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KBS가 표류하고 있다'는 글을 올리고 "상대적으로 사려깊지 않은 젊은 제작자들이 만든 프로그램, 좌충우돌의 프로그램은 왜 그다지도 많은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라며 "KBS 게시판에 연일 시청자들의 항의와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 사장이 취임하자마자 20~30년을 방송 외길을 달려온 수많은 간부들이 어느날 갑자기 비개혁적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나기도 했다"면서 "이렇게 발령이 난 사람들의 수가 무려 50명이 넘었고 이들 대부분은 허울좋은 '전문위원'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나 하는 일 없이 자리를 지키게 됐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렇구나, 지금도 KBS엔 김형태가 고백했듯 차갑진이 그러했듯 하는 일 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혈세(수신료)를 축내면서 정권이 바뀌어 하얀 백지위에 새로운 세상을 그릴 날이 다가온다며 달뜬 얼굴의 '철밥통'들이 하나둘 아니겠구나...

암튼 당시 그의 글이 알려지자 역시 후배 기자들이 게시판을 통해 "오래 전부터 정치판 진출을 생각하고 출마하려고 준비해왔다는 점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이런 기회를 이용해 자기에게 유리한 계산을 하고있는 그대의 판단을 보니 분노는 물론 비참함과 연민을 함께 느낀다"는 류의 비판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는 KBS를 떠나 2004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경북 포항·남울릉지역 공천을 신청했다가 떨어지자 무소속으로 출마, 낙선의 고배를 들긴 했지만 정치인으로 완전 변신했다.

얘기가 좀 길어졌다. 앞서 얘기했듯 이번 차갑진의 일이 단지 개인의 문제나 일회적인 일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했던 게 내 뜻이었다. 왜 남의 방송사 출신들 얘기에 그렇게 핏대를 올리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KBS가 입만 열면 말하는 것이 국민의 방송이요, 시청자가 주인인 방송이라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광고주의 입김에 휘둘리는 방송이 아니라 국민의 수신료로 건강하게 운영되는 방송사가 되겠다며 수신료를 올려달라고 KBS 구성원들이 노사 구분 없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말이다. 이런 '고름'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으니 정말 심사가 편치않다. 강동순과 같은 KBS 출신들이 우리 방송에, 우리 사회에, 우리 아이들의 교육에 미치는 해악을 생각해보면 정말 용서가 안된다.

물론 언론인들의 부도덕한 행태나 정파적 행동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는 마당에서 유독 KBS만 그렇다고 단정하고 문제삼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KBS이기 때문에, KBS 노동조합이기 때문에, KBS 기자협회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보다 가혹해야 할, 짊어져야 할 숙명같은 게 있는 법이다. 그저 침묵할수는 없으니, 체면치레용으로 비판성명 한번 내고, 그러다 "그래도 우리 KBS 출신인데"하고 어물쩡 넘기는 짓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독하고, 진짜 선후배고 뭐고 없이 끝까지 문제삼아 댓가를 치르게 하는구나 하는 지독함을 보여줘야 KBS가 산다.

특히 우리 사회의 건강성과 도덕률을 심각하게 훼손할 것으로 예상되는 12월 19일 대선 이후의 정치사회적 환경이 방송을 포함한 미디어업계 전반과 언론계 역시 소용돌이 치게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더더욱 엄정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양승동 PD협회장이 말했듯 불건전한 KBS 문화를 밑동에서부터 도려내겠다는 엄정함과 자기 희생으로 지독한 혁신에 나서야 한다.

제2의 차갑진, 제3의 강동순이 나오게 하고 그들이 언론경력을 팔아 세상을 조롱하게 하는 힘은 바로 KBS안에, 우리 언론인들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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