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문제로 결국 탈이 났다. 11일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입장을 밝히고 청와대가 이를 뒤집는 과정이 이어지면서다. 가상화폐 투자자들은 전면적인 반발 움직임을 보였고 여의도 주변에선 이 문제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악재로 남을지 섣부른 예측을 내놓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상화폐 투자자들 중 상당수가 2~30대이고 이들은 인터넷 사용에 능숙하며 또 친화적이기 때문에 인터넷 여론은 크게 움직였다. 문재인 정권을 늘 정조준하고 있는 보수언론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거의 ‘가상화폐일보’를 방불케 하는 인터넷판 편집을 선보였다.

조선일보는 12일 지면 사설에서도 “후폭풍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정책을 내지르다시피 한 것도 어이가 없고, 그렇다고 한번 발표한 중대 정책을 이해 당사자들이 반발한다고 한나절 만에 뒤집은 것도 귀를 의심케 한다”면서 “이 정부의 11일 하루 행태를 보면 국정의 자격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11일 밤 조선일보 인터넷판 캡쳐

결론부터 말하자면 11일 정부가 보여준 혼란상은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발언은 정권 입장에선 ‘사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정부가 최근까지 가상화폐 거래에 대한 규제책을 강화해온 것은 사실이다.

특히 지난 8일에는 금융위원회가 6개 시중은행을 상대로 한 특별검사 배경을 설명하면서 가상화폐 투기 열풍을 금융권이 일부러 조장 방조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식의 인식을 드러내 반발을 불렀다. 김용범 금융위 부위원장은 현지시간 8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금융안정위원회(FSB) 운영위에 참석해 가상화폐 거래를 억제하기 위한 국제공조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을 해임하라는 취지의 청와대 청원은 이런 흐름 속에서 먼저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금융위원회의 이런 강경한 행보는 반쯤은 타의에 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현재 가상화폐 투기 등의 문제를 다루는 범정부 가상화폐 규제TF에는 금융위원회와 함께 법무부, 기획재정부, 국무조정실, 한국은행 등이 참여하고 있다. 가상화폐 거래 열풍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한 대책은 현재로서는 시중은행의 가상계좌 발급 등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금융정책의 문제이지만, 과세방안 등에 대해서는 기획재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고 가상화폐의 특성을 이용한 자금세탁 등 범죄행위는 법무부가 주로 다뤄야 한다.

이런 구조에서 금융위원회나 기획재정부는 가상화폐 거래를 양성화해 관리 가능한 범주 내에 두도록 하는 방법을 선호할 수밖에 없고 법무부는 경제논리보다는 범죄를 막기 위해 상대적으로 강경한 입장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때는 늘 어느 부처에 힘이 쏠리느냐가 중요하다. 사안 자체를 놓고 보면 금융위원회나 기획재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해야 할 것 같지만 부처 간의 입장 차이는 늘 정무적 문제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 정부에서는 어찌됐건 금융위원회의 힘이 강하지 않다. 청와대에 포진한 주요 관료들 중에도 금융정책을 전문으로 하는 인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늘 ‘패싱’ 논란에 휩싸이곤 하는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주특기는 기획 예산 분야이다. 거기에 이 정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분야 중 하나인 사법개혁 문제를 떠안고 있는 법무부가 논의에 낀 상태다. 누가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법무부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장관의 역할은 이런 때 중요하다. 전체적인 상황을 보고 자기 부처 입장을 조율해줘야 한다. 이런 일은 관료나 정치인 출신이 잘 한다. 그런데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학자 출신이다. 더군다나 문제 발언이 나온 자리는 신년 기자간담회였지 가상화폐 관련 정책 방향만을 밝히는 자리도 아니었다. 사법개혁 등의 문제에 대해선 준비된 답이 있었겠지만 이 대목과 관련해서는 준비가 덜 된 상태로 자기 소신을 설명한 것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11일의 상황은 이런 여러 요인들이 돌발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11일 오전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법조기자단 간담회에서 가상화폐, 수사권 조정 등 현안과 관련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거 정부였다면 바로 반발하고 상황을 바로 잡으려 했을 금융위원회는 파열음을 최소화하는 데 더 주력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법무부 장관의 말은 부처 간에 조율된 것이고, 서로 협의하면서 할 일을 하고 있다”면서 “장기적으로 이런 거래가 계속된다면 취급 업소 폐쇄까지 가능한 입법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는 다소 애매모호한 발언을 이어간 것이다.

결국 청와대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고 가상화폐 관련 시세는 다소 진정됐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정부가 한 차례 밀렸기 때문에 이후 가상화폐 거래 규제를 위해 꺼낼 ‘칼’은 날이 다소 무뎌진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게 됐다. 무뎌진 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더 세게 내리쳐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칼을 휘두르는 시늉만 하고 문제 해결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경로든 긍정적 영향 보다는 부작용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선 스스로 냉정한 평가를 해야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개별 투자자의 이해관계나 선거에 미칠 영향 등을 떠나 이 문제를 공동체의 차원에서 사고해볼 필요도 있다. 11일 일어난 일과는 별개로 2~30대의 가상화폐 투자 열풍은 사회적 문제로 다뤄야 한다. 사회가 만든 ‘룰’에 따라 성실히 사는 것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어떤 감각이 젊은 세대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존’이란 실제적인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 경우의 생존에 대한 절박감은 가상적이고 유희적인 것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가상화폐 투자자들이 인터넷 곳곳에서 자기가 손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돈의 액수를 보면 알 수 있다. 한 방송에서 고액의 수익을 낸 투자자가 “5천만원은 있어도 흙수저, 없어도 흙수저다”라고 한 말이 ‘명언’으로 회자되는 게 대표적이다.

먹고 살만한 수준에 있는 이들도 일상적 절망감을 느끼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체제가 끊임없이 개인에게 어떤 양품(良品)의 자격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여기서 탈락한 이들은 폐기가 당연하다는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평생 벌어도 의식주의 하나라는 집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다. 구매력과 지식을 갖춘 계층이 가상화폐 투자에 뛰어드는 동안 없이 사는 사람들은 로또를 산다. 지난해 로또 판매액은 3조7천974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이 문제를 공동체의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선거 유불리만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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