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안보 관련 문제는 정권이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늘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 ‘선택’에 내포된 맥락을 모두가 아는 것은 어렵고 언제나 이익이 되는 선택만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적인 방식으로 비판을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의 현안에 대한 보수언론 반응을 보면 과연 그런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먼저 9일 진행된 남북 고위급 회담에 대한 보도이다. 남북 고위급 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했지만 앞으로의 먹구름을 예고하며 끝났다. 이렇게 된 이유는 평창동계올림픽 관련 이야기가 앞에 놓이고 북핵 문제 등의 남은 이야기가 뒤에 놓였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비핵화 관련 이야기를 꺼내자 처음에는 그냥 듣고 넘어가자는 분위기이던 북측은 이내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언쟁 모드’로 전환했다. 회담의 내용을 전달받은 상부에서 결정한 일로 보인다.

이런 정황을 보면 남북관계가 순조롭게 풀릴 수 있는 대목은 아직까지는 평창동계올림픽에 한정돼있는 상황인 듯 하다. 북한은 남북 간의 접촉이 비핵화 논의로 이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북한을 비핵화 논의로 끌고 와야만 한다는 절박감을 갖고 있다. 물론 이 시도가 성공할 것으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결국 평창동계올림픽에 북측의 고위급 인사가 참석하고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으로 화해무드는 종결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서 올림픽보다 올림픽 이후의 국면이 더 중요한 것이다.

북한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왼쪽)과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9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회담 종료회의에 공동보도문을 들고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수세력 일각은 북한의 호응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풀기 위한 차원에 그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한 진단은 일리가 있고 실제 사실과 가까울 것이다. 중국의 태도에 실마리가 있다. 중국은 그간 유엔 안보리 결의에도 대북제재에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남북이 대화의 가닥을 잡은 이후에야 중국 내 북한 기업 등에 대한 본격적인 제재에 들어갔다.

물론 이는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안을 이행하는 정상적 일정에 따른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지난해 말까지 중국이 공해상에서 북한에 유류 등을 제공하는 ‘제재의 구멍’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새해 들어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중국 정부의 의지가 실려 있는 행보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중국이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현 시점에서 대북제재에 힘을 실으며 생색을 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장기화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조치 이후에 남북대화의 결과로 북한에 대한 제재를 느슨하게 할 근거가 생긴다면 중국으로서는 국제사회에 대북제재의 성실한 이행을 말하면서도 대북제재 완화를 시사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 입장에선 더더욱 이번 남북간 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비핵화 국면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잘 되지 않는 경우를 이야기 했지만 평창동계올림픽 이후에 남북관계가 풀리는 방향으로 정국이 움직인다면 우리 정부가 중재를 서면서 북한과 미국 등 국제사회가 협의에 나서는 국면을 열 수도 있다.

물론 지난 보수정권 9년이 만든 현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국면에서도 당장 비핵화가 이뤄지긴 어렵다. 북핵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장기화될 것이지만 적어도 대륙간탄도미사일이나 핵실험 등의 돌발변수를 억제하는 상황관리의 수단을 주변국들이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현 정국에 대한 기대의 수준은 ‘잘 될 것이다’가 아니라 ‘잘 해야 한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대화론자들을 바보 취급 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려 한다. 문재인 정권이 남북관계에 대한 장밋빛 전망에 취해 당장에라도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산이라는 얘기다. 10일 보수언론 지면에 실린 남북 고위급 회담에 대한 보도 및 사설들이 대개 그런 식이다. 예를 들면 조선일보 사설은 “북은 핵을 폐기할 생각도 없고 비핵화 문제를 남한과 논의할 생각도 없다는 뜻이다. 이게 진짜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마치 누구나 아는 얘기를 문재인 정권만 모르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 들어 대화론자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건 정권이 바보여서가 아니라 지난 보수정권의 해법이 북핵문제를 더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보수언론은 아랍에미리트 관련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다. 9일 중앙일보 지면에 실린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의 인터뷰와 최근 정의당 김종대 의원의 활약으로 이 사건의 실체는 거의 드러났다. 이명박 정권이 원전 수주 과정에서 아랍에미리트에 유사시 군의 자동개입 등 지킬 수 없는 군사적 약속을 해줬고, 이후 실제로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이 정부 들어 지킬 수 없는 약속의 내용을 바로잡으려다가 반발을 샀고, 그것을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급파해 수습했다는 얘기다.

조선일보는 10일 사설에서 이 문제를 “전(前) 정권을 공격할 거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다가 제 발등을 찍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전 세계의 국가 간 대형 거래엔 밝히지 않는 이면 합의 사항이 있는 것이 상례”라고 주장했다. 또 아랍에미리트와의 협력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이뤄져 왔기 때문에 하나가 흔들리면 연쇄적으로 악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면서 “그런 문제를 국내 정쟁에 이용하겠다고 접근하다가 UAE를 자극한 것”이라고 썼다. 문제의 본질이 적폐청산의 탈을 쓴 ‘정치보복’에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오후 청와대에서 아랍에미리트 왕세제 특사 자격으로 방한한 칼둔 칼리파 알 무바라크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행정청장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 것이라면 이 정부가 굳이 아랍에미리트에 이명박 정권이 맺은 비공개 협정을 바로잡자는 제안을 할 필요가 없다. 국내에서 먼저 여론화시키면 그만이다. 이전 정권 관계자들이 비판의 화살을 맞게 한 이후에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으니 양국 관계를 유지하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하면 된다. 어차피 쉬쉬하게 될 일을 두고 임종석 비서실장이 비공개로 아랍에미리트에 날아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이 문제를 정쟁화한 것은 조선일보와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였다. 국정원의 첩보 역량을 활용해 정치보복을 하려다 아랍에미리트 왕정의 비자금을 건드리게 됐다거나 탈원전 정책의 여파로 아랍에미리트가 우리 정부를 믿지 못하게 됐다는 식의 확인되지 않은 주장이 횡행했다. 사실과 맞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그렇게나 중시하는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조선일보의 탈원전 정책에 대한 공격은 이전부터도 매우 저열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핵발전소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으면서 영화 판도라와 ‘괴담 교수’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게 됐다는 식이었다. 한겨레는 10일 사설에서 조선일보 보도를 두고 “청와대가 거듭 부인했음에도 확인되지 않은 단편적 사실들을 무리하게 엮어 마치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외교 갈등이 초래된 것처럼 몰아세웠다. 언론 본연의 궤도를 이탈한 무책임한 보도 행태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썼다.

아마 이 사설이 이제 출구전략을 모색했어야 할 조선일보가 자기 보도의 정당성을 재차 주장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아랍에미리트 문제를 활용해 ‘문재인 바보론’을 말하려다 결국 이런 망신을 당하게 됐다. 제대로 된 비판이 아니라 상대를 바보 취급하는 여론전을 앞으로 계속하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것이다. 심지어 동아일보마저도 이명박 정권의 비공개 군사협약에 대해 “중동의 수니파 국가와 이 정도 무게의 군사협정을 체결하면서 국민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됐다”고 하는 일이다. 뒤늦게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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