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치인은 다당제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지금의 한국 정치가 제대로 된 다당제의 원리로 돌아간다고 말하긴 어렵다. 정치 문화 자체의 문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야당이 바람직한 정치를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게 그렇다.

가장 문제적인 정치 세력은 자유한국당이다. 이 정치세력을 언제까지나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탄핵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이제는 현재의 자유한국당을 평가해야 할 때다. 그런데 바로 그 점에서 자유한국당에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대법원이 홍준표 대표 무죄를 확정판결 한 이후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들의 이어지는 행보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최근 자유한국당이 집중하고 있는 의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UAE) 방문에 관한 것이다. 청와대는 임종석 비서실장의 이례적 일정에 나름대로 여러 설명을 내놓았으나 의문을 명쾌하게 해소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25일 경향신문 보도에 대해서도 그랬다.

경향신문은 임종석 비서실장의 UAE 방문이 사우디아라비아를 필두로 한 중동 수니파 국가들의 카타르 단교 사태와 연관이 있다고 보도했다. UAE가 한국의 카타르산 LNG수입을 문제 삼으며 바라카 원전 1호기를 볼모로 잡았다는 것이다. 이어진 다른 언론의 보도를 보면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에 대해 “아닌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아니다”라고 하진 않았다는 점에서 애매한 태도를 보인 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태도를 계속 고수하는 것에는 나름 외교적 측면에서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지만 어쨌든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최소한 애초에 의문을 제기할 틈이 없는 형태로 상황을 관리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연합뉴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자유한국당의 태도는 그야말로 황당한 수준이다. 문재인 정권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바라카 원전에 대한 비리를 조사하다가 UAE 측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게 이들의 꾸준한 주장이다. 자유한국당은 26일 청와대 항의방문을 예고하는가 하면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UAE에 파견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외교 실패를 말하면서 오히려 외교적 문제를 조장할 수 있는 방법을 굳이 선택하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임종석 실장의 UAE 방문이 국가 안보와 연관된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중앙일보는 26일 지면에 한국 정부가 UAE 정부와 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포함한 첨단무기체계 분야의 방산협력강화를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UAE는 수니파 국가로서 예멘 내전에 참전해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협하는 후티 반군과 싸우고 있다. 후티 반군은 탄도미사일로 UAE의 해상유전 등을 타격할 계획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의 타깃에는 바라카 원전도 포함된다고 한다. 따라서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바라카 원전을 방어하기 위한 요격미사일 등의 측면에서 협력을 이룰 수 있다면 ‘윈-윈’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UAE의 미사일 전력 강화에 도움을 줄 경우, 시아파의 맹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대립하고 있는 이란과 적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란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 때문에 러시아, 북한, 중국 등과 가까워져 있는 상태다. 북한은 그렇다 치더라도 러시아, 중국은 북핵문제 해결의 중요한 키를 쥔 국가들이다. 중동에서 벌어진 문제가 동아시아 정세에 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만일 UAE와 이런 방식의 군사협력을 진행하고 있다면 이 문제는 최대한 정치쟁점화 되지 않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

그렇잖아도 북핵 문제는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최근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증가하고 있고 한반도 내 미군 관계자들을 소개하기 위한 비상대응도 준비하고 있다면서도 김정은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을 거라고 발언했다. 미국의 군사적 옵션 행사나 대북제재 장기화에 대한 외신 보도가 늘어나는 현상도 있다. 미국과 중국이 김정은 정권 붕괴 이후 상황에 대해 모종의 합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추측도 나온다.

유엔 안보리는 현지시각 22일 북한의 ICBM급 미사일 발사 시험에 대응하는 새로운 제재결의안을 표결했다. 중국, 러시아가 동의한 결과이다. 미국과 중국은 핫라인을 열어 대북제재를 한층 더 긴밀하게 공조한다고 한다. 중국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있는 북한은 유엔 안보리 결의를 전쟁행위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미사일 발사 시험이 아니라 평화적 우주 이용을 위한 위성 발사 실험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눈길은 김정은의 신년사에 담길 메시지와 평창 동계올림픽 전 추가 군사 도발이 있을지에 쏠리고 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 제1야당이 UAE 방문까지 고려하는 것은 무책임한 정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한국당이 이 문제를 쟁점화 하는 배경에는 국회 운영위원장 문제가 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25일 국회에서 긴급 원내대책회의를 주재하면서 “민주당은 UAE 원전게이트 특사 의혹을 갖고 있는 임 실장을 보호하기 위해 국회 운영위원장을 선출하지 않겠다는 전대미문의 천인공노할 작태를 벌이고 있다”, “작년 20대 국회 원구성 관련 교섭단체 합의사안을 보면 한국당이 운영위원장을 맡는다고 돼있다”고 했다. 국익만을 절대시하는 태도도 문제겠지만 그렇다고 정략이 국익에 우선할 수는 없는 일이다.

25일 오전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와 권석창 의원(오른쪽 첫번째)이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희생자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제천실내체육관을 방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이 화력을 집중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제는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25일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한 후 사고 당시 소방당국의 대응을 비판하면서 “(문재인 정권이) 정치 보복을 하고, 정권을 잡았다고 축제하는 데 바빠 소방 재난 점검을 전혀 안 했을 것”이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국민적 참사를 앞에 두고 책임있는 정치인이 한 말이라 믿기 어렵다. 그야말로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춘 정치세력이라면 대표의 이런 돌출 발언을 수습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한술 더 떠 26일 청와대 앞 분수대 인근에서 제천 화재 참사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촉구 기자회견까지 한다고 한다. 물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중요하지만 누가 봐도 자유한국당이 참사를 정쟁의 소재로 삼겠다는 태도가 분명하다는 게 문제다.

예를 들면 자유한국당 권석창 의원은 현안 파악과 이후 진상조사 등을 준비해야 한다며 유족들도 들어가지 못하는 현장에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가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무리수를 굳이 두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상황이 이런데도 보수언론을 포함한 보수세력들은 오히려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며 이 시대의 만능단어인 ‘내로남불’만 되뇌고 있다. 오히려 이들의 태도야 말로 ‘세월호 때 우리가 당한 것처럼 너희도 당해봐라’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중요한 것은 같은 사고를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한겨레 26일 지면에 실린 기사를 보면 제천소방서의 절대적 인력 부족이 피해를 키운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 기사에서 현장 관계자는 “제천소방서의 구조 인력은 4명뿐이다. 당시 현장에서 대응할 인력이 없었다”, “가용할 인력이 없어 화재 진압과 동시에 건물 진입 등을 시도하지 못했다. 소방서 한곳에서 한꺼번에 30~40명이 출동하고, 주변 소방서에서 바로 지원 가능한 서울이라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정말 안타깝지만 여긴 시골”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제천소방서는 이런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가? 정치는 이 문제를 왜 여지껏 해결하지 못했나? 이게 바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원하는 사람들이 던져야 할 질문이다. 당장 지난 예산국회를 돌아보라. 지금 남 탓을 할 때가 아니다. 석고대죄를 해도 모자랄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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