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병훈 PD의 사극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충실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구현해낸 기록 그대로의 과거를 되짚어 보는 발견도, 각종 암투와 모략이 넘실거리는 진흙탕 속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주인공의 인생 역전 드라마도 아닙니다. 사극이라면 기대할 수 있는 당연한 재미인 역사적 정밀성을 기대하기엔 그의 작품은 너무나 상상의 폭이 넓고, 미드식의 짧고 빠른 호흡의 극복 스토리는 너무나 자주 반복되었기에 이젠 좀 식상하죠. 그래도 여전히 그 친숙함을 무기로 월화 드라마의 지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동이는 여러모로 이병훈식 사극의 정체, 혹은 한계가 보이는 작품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도 적극적인 역사해석과 주인공에 대한 과도한 집중 때문에 숙종은 철부지 로맨티스트가 되어 버렸고, 동이는 당돌하지만 별 매력 없는 슈퍼우먼으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동이만 쳐다보는 이 만능 소녀는 시청자들이 그녀의 시련을 극복하길 기대하기엔 그리 정이 가질 않아요. 그냥 그런가보다, 숙종은 인간적으로는 참 매력 있을지 모르지만 왕치고는 너무 가볍구나, 이 아이는 정말 못하는 게 없는 천재인가보다, 그래서 결국 왕도 사랑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은 맥없는 결말을 짐작하게 만들죠. 다른 세세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독창적이다 못해 과감한 재해석은 흥미와 관심을 넘어서 우려와 걱정을 하게 하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동이가 어떠한 매력도, 재미도 없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 이 드라마의 큰 줄기인 동이의 영조 엄마 되기 성공 스토리나 장희빈의 서서히 악녀로 변해가기 같은 내용보다는 조선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재미있게 보여주는 접근이 더 재미있어요. 극 초반 악공들의 모습을 살짝 내비친 것이라거나, CSI를 보는 것처럼 조선 시대 검시관의 활약과 추리의 방식에 대해 보여준 것은 재미있었어요. 대장금에서 음식을, 정조 이산에서 그림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동이 역시도 이런 소재의 즐거움을 전달해주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아요.

그래서 궁궐 내 감찰부가 수행한 궁녀들의 소지품 검사는 무척이나 기발하고 재미난 에피소드였습니다. 동이의 주요 활동 무대를 편안하게 보여주면서도 그녀의 필생의 목표인 아버지와 오빠의 원수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도 기능했던 이 소지품 검사는 또 한편으론 그 당시 궁녀들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 주었습니다. 화려한 궁궐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그녀들의 생활이란 결국 군대에 입대한 것이나 다를 바 없이 물욕, 성욕, 자유 모두가 억압된 답답한 삶이었다는 것이죠.

마치 군복무 당시 검열을 받았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고나 할까요?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소지품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어떻게든 위험한 물건들을 숨기려 했던 그 얄팍한 꼼수들을 보는 것 같아 재미있고, 방뒤짐의 권력관계가 결국은 동료들의 손에 이루어진다는 묘한 상관관계도 흥미롭고, 그런 소지품들 속에 담겨있는 그들의 갑갑함이 보이기도 했구요. 동성의 거대 집단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궁녀라는 조직은 결국 오늘날의 군대처럼 구성원들 각각의 욕구를 억압하고, 인신의 자유가 제한되는, 그 안에서는 왕 한사람만을 바라보는 희박한 신분상승의 욕구가 숨겨져 있는, 더더욱 각종 감정들이 안으로 뭉쳐있는 욕망덩어리였으니까요.

그래서 궁녀들의 삶은 이렇게 살짝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재미난 소재입니다. 그런 그녀들의 치부를 다스리는 감찰부에 동이를 위치시켰으니 이 드라마가 다룰 수 있는 재미 또한 무궁무진하구요. 마치 조선시대 여군들의 일상을 보는 듯한 묘한 기시감. 다른 어떤 연출가도 할 수 없는 이런 세세한 즐거움이 이병훈 PD의 작품을 보는 진정한 재미라고 생각해요. 비록 여전히 동이에겐 정이 안가고, 숙종은 이상하고, 장희빈은 위태위태하지만 그래도 월화 저녁 드라마 선택의 제1순위 자리를 뺐기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런 풍부한 볼거리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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