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세한 신자유주의 자본권력, 완성될 자본국가는 이성적 비판의 덕목, 합리적 비평의 선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공적이상 발휘의 공간은 선전으로 가득 채워지고, 언론자유 수행의 거리 곳곳에 차단 벽들이 설치되었다. <미디어스> 등에서 네티즌의 리플이 금지된 지금의 기형을 어찌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권력홍보 매체, 체제선전 뉴스가 횡횡하고 있다. 조․중․동만의 특수한 현상이라면 오직 좋겠는가? 저널리즘의 기본에 충실한 <시선집중>, <쌈> 등 소수의 목소리가 구속되고 있다. 비판의 목소리들이 쑥 들어가 버렸다.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권력의 눈치를 보는데서 나아가 서로 먼저 선을 대고자 오늘밤 어디선가는 희희낙락 분주할 지도 모르겠다.

비평판도 앞으로 개판이 될 게 뻔하다. 말의 난장판이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말꾼들이 또 얼마나 세련되고 자유로운 레토릭을 내 놓을 텐데. ‘매체비평’, ‘언론비평’, ‘저널리즘비평’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내세우며. 학자적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당파적’, ‘정파적’이라는 비난을 퍼부으면서. 이렇게도 볼 수 있지만,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교묘한 절충주의로 무장해. 권력을 ‘견제’, ‘감시’하는 척하고, 대중의 유감과 호기심을 적당히 주물러주면서. 납작 엎드려있던 그 많은 자유주의 비평가들이 기회를 틈타 온갖 화려한 수사로 부활할 것이다. 별별 이름의 기회주의자들이 자본과 시장, 권력과 야합해 파리 떼처럼 윙윙대며 몰려다닐 것이다. 지극한 혼란과 혼돈의 상태.

▲ 12일 오후 3시 선거방송심의위원회 제9차 회의를 앞두고 MBC와 KBS 방송 현업인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선거방송심의위원회의 '정파적 심의'와 한나라당의 '방송탄압'을 규탄했다.ⓒ정은경 기자
옳고 정직한 소리를 내기초차 힘들 것이다. 그렇게 될 게 뻔하기 때문에 매체비평에의 적극적 개입을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공적영역 폐쇄의 비관적 사태가 예견되기 때문에 더욱 더 매체비평의 공간을 확보하고 그래서 언론해방, 사회진보의 교두보로 지켜내는 데 주력해야 하지 않겠나? 요컨대 매체비평을 말 그대로 민주공화국 최후의 보루로서 사수하는 게 바로 지금,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 우리에게 위임한 역사적 선택이 아닌가? 매체비평의 역능을 발휘함으로써만 수구매체와 자본권력의 동맹에 금을 내고, 그럼으로써 미디어의 공공성을 보존하고 또 그래서 자유언론의 사회적 역능을 재생산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비판이, 매체비평이 체제선전의 전위에 맞서고 자본권력의 중심을 파고드는 또 하나의 운동이지 않나?

‘그렇다’는 신념과 판단을 재확인하면서 또다시 시작한다. 그런 자신감 아니고서야 대체 무엇을 어떻게 도모할 수 있겠는가? 냉소와 허무, 회의의 조류가 닥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위치를 설정하고 훈련된 자세를 가다듬으며, 무기를 더욱 연마하는 것 외에 해답이 없다. 가끔씩 큰 외침으로 주변의 동지들에게 긴장감을 주고, 그러다가 웃음으로 피곤을 달래주며, 그러면서도 지친 이들을 대신에 예리하게 시야를 확보하는 게 우리가 자임해야 할 포스트의 역할이다. 상황은 불안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나, 그래도 남은 선수와 함께 비축한 ‘비판의 무기’를 활용해 공론의 지대를 사수하는 게 지금 당장 우리의 책무다. 현재의 모순에 대한 단호한 부정, 미래의 진보에 대한 분명한 긍정 외에 매체비평이 기댈 곳은 없다.

매체비평 생존의 전략, 승리의 전술에 보다 많은 신경을 써야 하겠다. 전략적 마인드, 전술적 책략에 기초한 게릴라 비평(가)의 전쟁기계가 되어야 한다. 비평의 한 칼로 선전의 허방을 찌르기 위해 훨씬 더 기민하고 예리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웃음으로 거짓을 베어내고, 농담으로 선전을 고발하며, 욕설로 진실을 해방시킬 줄 알아야 한다. 시장의 언어를 자유자재 구사하고, 대중의 직설적 말투를 배워야 한다. 선정적인 표현을 모방할 줄 알아야 하며, 감성적 이미지 사용법도 알아야 한다. 대중과 통할 창의적 비평의 방법론을 고민하고, 그래서 대중을 선전의 망에서 떼어내지 않고서는 진보적 매체비평은 아무 것도 꿈꿀 수 없다. 대중 확보의 중대성으로부터 <미디어스>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대중 접선의 결정적 포인트로서 서둘러 자리 잡는 일이다.

모두를 전체의 일분자로 동원하는 전체주의 파시즘의 극악한 공포 속에서도 벤야민은 ‘사유의 유격전을 위한 현대의 교본’을 남긴다. <일방통행로>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잰 체하지 마라. “현재 활동 중인 공동체들에 효력을 미치기에 훨씬 더 적합한, 언뜻 싸구려처럼 보이는 형식들, 즉 전단지, 팸플릿, 신문 기사와 플래카드 등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처럼 기민한 언어만이 순간순간을 능동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맞다. 잘난 놈들끼리의, 일정한 거리를 둔 순수한 비평의 시절은 갔다. 현실과 밀착한 상황에서, 선전이 난무하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 그것도 냉담한 대중 속에서 매체비평을 해 나가야 한다. 거기에 매체비평의 희망이 있고, 또 그래야만 매체비평의 희망이 있다.

신자유주의 절대 권력은 더욱 무자비해질 것이다. 민주언론, 방송독립의 공간은 크게 상처를 입을 것이고, 고통의 비명, 원망의 아우성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올 것이다. 정상적 비평의 질서가 붕괴되고, 제조된 여론의 체제가 완성될 것이다. 아첨의 칼럼, 폭력의 사설, 불구의 기사들이 TV화면, 신문지면을 지배할 것이다. 거짓이 진실을 가장하고, 궤변이 발언을 대체하며, 표피가 실체를 억압할 것이다. 거짓비평의 외설, 비판적 외양/외양적 비판의 스펙터클. 이런 개판일 게 뻔한 데, 그 한 가운데서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피아를 정확히 분별해내며 옳은 목소리를 하나로 규합하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그래도 비평은 비평을 행함으로서 무기의 힘을 발휘할 수 있기에, <미디어스>에도 필진으로 가담한다. 풍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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