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 Truth'라는 단어가 2016년 한해 세계적으로 각광 받은 단어로 자리잡았다. 그해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서 승리했고, 그가 선거기간 내내 주력하고 고양시킨 게 다름 아닌 탈 진실이라는 정치 신세계다. 사실의 기호와 무관한, 진실의 코드를 넘어선 말이 안 되는 수사, 자극적 감성으로 충만한 언술로써 그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아니, 전쟁에서 이겼다. 당선된 후에도 그가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적인 정치 무대에서 그런 정치기술, 전쟁테크닉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퇴행적 양상을 설명하는 데 대체 다른 어떤 언어가 더 어울릴까? 캠브리지 영영사전에 따르면, ‘탈 진실’은 시대변화에 조응하여 2016년 그 사용빈도가 무려 2000 퍼센트나 늘어났다.

그렇다면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이와 무관한 진실의 시대, 진실 정치의 패러다임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가? 그래서 정상 정치의 상태인가? 전혀 그러하지 않다. 한국의 정치도 명실상부 ‘탈 진실’의 판으로 급전했고, 정치권과 국가가 그 타락을 사실상 유도했다. 사실보도를 책임진 공영방송과 언론매체를 물리적으로 통제하고, 진실규명이 가능한 인터넷 대중교통 공간을 군사적으로 차단했다. 대신에, 국정원이 직접 나서고 댓글 부대가 암약하며 온갖 단체 요원들이 동원되어 감정적인 가짜 뉴스, 자극적인 허위 정보, 공격적인 선전 언어들을 대량으로 회전·유포시켰다. 진압된 인터넷은 물론이고, 무력·무능해진 주류 뉴스 채널조차 이런 저런 공작적 언어, 조작적 정보들로 혼탁해졌다. 지난 10년간 벌어진 무서운 역류 현상이다.

2009년 5월 13일 SBS뉴스 '논두렁 시계' 보도 장면 (SBS뉴스 캡처)

국정원 개혁위원회가 확인한, 국정원이 개입해 벌인 것으로 확증한, 이른바 노무현 전 대통령 ‘논두렁 시계’ 보도 공작은 그 정확한 증거가 된다. ‘고가 시계 수수 건’을 갖고 노무현 전 대통령 망신주기 차원에서 활용하라는 국정원장의 지시가 측근 간부를 통해 대검찰청 중수부장에게 전달된다. 뉴스기관을 활용하라는 공작지시다. 그리고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힐 보도가 KBS와 SBS를 통해 이어진다. 특히 5월 13일 SBS 8시 뉴스는 제목이 “시계, 논두렁에 버렸다”다. “박연차 회장이 수사를 받자 집 사람이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자막이 노 전 대통령의 얼굴과 함께 선명하게 부각된다. 시청자들은 당연히 저 말을 노 전 대통령의 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건이고 본인도 앞서 <미디어스>를 통해 한 차례 쓴 바가 있기 때문에 이에 관해 재론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저 사건이 이명박·박근혜라는 탈 진실 정치시대 국가권력기관, 국가정보기관이 주도한 전형적 정보조작, 언론조작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국가에 의한 조직적 언론조작, 체계적 담론조작이 사태의 진실이라는 점이다. 국가권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보를 흘리면, 그게 사실인지 진실인지 확인할 수 없는 현장의 기자, 무책임한 데스크, 경쟁적 보도기관들은 마치 횡재를 얻은 양 그걸 덥석 받아 적을 것이다. 그래서 멋 떨어지는 제목의 뉴스가 탄생한다. “시계, 논두렁에 버렸다”는, 누가 말의 주체인지조차 확정 불가능한, 이상한 작품이다.

시중 여론이 흥분한다. 비난이 쏟아진다. 자극 덩어리의 뉴스보도가 유발하는 당연한 효과다. 냉정한 판단은 더 이상 기대 불가. 누구라도 딱 보면 불쾌의 감정을 먼저 갖기에 충분한 언어들로 구성된 뉴스이지 않은가. 아무리 신뢰가 떨어진 주류매체라지만, 저렇게 따옴표까지 치면서 정확하게 인용하고 있지 않은가? 당사자가 시인한 말처럼.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죽음으로 내몰리고, 정상적 정치의 게임은 파산이 난다. 그런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보도다. 말했듯, 비판 언론학 교재에 반드시 현실사례로 새겨놓을만하다. 디테일하게. 국가 정보원이 유출한 정보가 어떻게 흐르고 이어져 특정 채널의 ‘특종’ 뉴스로 탄생하고 결과적으로 여론으로 구성하게 되는가? 그 구조화된 뉴스제조의 과정에서 사실과 진실은 어떻게 희생이 되는가?

환상과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거짓과 선전은 어떻게 작동하게 되는가? 진실은 어떻게 폐기되고, 언론은 어떻게 통제되는가? 기자와 데스크, 뉴스채널은 이 여론왜곡, 정치공작의 시스템의 일부에 된 것에 관해 어떤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가? 당연히, 기자는 현장에서 자신이 취재한 내용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국정원의 개입이, 검찰의 의도가 있었는지는 자신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항변할 게 틀림없다. 데스크 또한 그런 맥락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취재기자의 발제내용을 듣고 뉴스가치가 높다 판단해 ‘사실’을 보도했을 뿐이라 항변할 게다. 방송사는 뒤로 빠져 남 몰라라 하거나 아니면 ‘시청자의 신속한 알 권리’를 되뇔 테고. 이런 전형적, 공식적 반응도 가히 교과서적이다.

한 달에 걸친 SBS 진상조사위원회가 최종 보고서를 내놓았다. 안타깝게도, 그 내용조차 예상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논두렁 시계 보도에 대한 국정원 개입은 확인할 수 없었다.” 국정원이 움직인 건 사실일지라도, 자사 보도에 직접 관여하진 않았다는 걸로 들린다. 당연한 소리,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그걸 누가 어찌 밝혀낼 것인가? 국정원이 기자를 만나 정보를 흘리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뉴스제조시스템, 그렇게 이루어진 여론공작활동이 아니라고 말했지 않은가? 시스템이 돌아간다. 구조적으로 돌아간다. 기자와 채널은 그 말단의 이차적 부속기관으로서 선전전파의 기능을 맡게끔 되어있는 게 핵심이다. 국가정보기관의 정보를 끄덕끄덕 받아 적고 그걸 특종으로 서둘러 리포팅하는 안위의 습속체제에 빠져있는 한, 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실패는 이미 구조화된 일이다.

사실, 취재기자도 이렇게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3년에 걸쳐 쌓은 대검 중수부 ‘관계자’에 대한 신뢰도에 비춰 노 전 대통령이 “논두렁에 시계를 버렸다”는 해당 ‘취재원’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국정원-검찰 사이에서 오간 공작 지시의 링크가, 검찰 유력 정보원-기자 매개자 사이의 상호의존적 고리로써 완결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이걸로 충분한 것이다. 게임 끝. 비판 언론학 교재를 한권쯤 읽어본 사람이라면 국가의 뉴스제조, 여론공작, 언론왜곡 시스템이 이번 사례에서도 정확히 공식처럼 반복되었음을 금방 추론할 수 있다. 그런 데도 보고서는 이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채, 추가 사실의 확인 불가능성을 강조하면서, 핵심을 겉돈다. 사측에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다. SBS가 당장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자책에서 빠져나가는 수습책.

당시 사장, 보도국장이 모두 조직을 떠나고 조사를 기피해 더 이상의 내막은 알 수가 없었다, 외부의 협조가 없어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다는 등 진상파악의 불가능성을 강조할 따름이다. 다만, 명백한 규명에는 실패했지만, “이번 조사가 지금도 언론이 끊임없이 쏟아내는 검찰발 수사 속보와 단독 보도의 취재 관행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갑갑하다. 가당치 않은 소리, 변명. 한가롭다. 문제를 일반화하고 여유롭게 성찰을 기대하기 이전에, 현재로서 확인된, SBS 뉴스 시스템이 국가권력 공작정치에 말린 게 맞다는 사실에 관해, 회사 차원의 책임을 묻고 회사 차원에서 사죄를 요구하는 게 우선이다. 저널리즘 실패에 대해 도의적 책임.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 그래야 뭐라도 바뀌고 또 뭐건 의미 있는 체제변화가 내부적으로 가능하다.

당시 하금열 SBS 사장의 충격적인 행적은 이미 밝혀진 바대로다. 해당 뉴스를 저 따위로 나가게 만든 최종 책임자 최금락 보도국장의 수상쩍은 판단은 미제로 남는다. 그들은 모두 진상규명을 거부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은 그것이 4인 조사위에서 나온 것이건, 노동조합의 입장이건, SBS 사측의 태도이건 너무나 무책임한 것이다. 사태의 중대성에 비해, 쉽게 용납하기 어려운 태도다. 사장은 국정원 직원과 내통하고, 현장기자는 바로 그 국장원이 토스한 정보를 검찰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받아 기사로 만들어내는 구조에 갇혀있으며, 데스크는 오히려 자극적인 제목과 오해를 빚을 화면 구성으로 이를 승인하는, 그래서 최악의 선전뉴스가 만들어지는, 총체적 시스템 실패에 대해 대체 SBS가 아니라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나?

말했듯, 요즘 정치학 등을 중심으로 ‘탈 진실’이라는 용어가 꽤 유행이다. 영어 ‘Post Truth’를 번역한 것인데, 좀 어색한 표현이긴 하다. 그렇지만 개념적 유용성은 꽤 높고 뜻도 아주 분명하다. 간단히 말해, 객관적 사실이 지녔던 사회·정치적 영향력이 퇴락한 상황을 가리킨다. 대신에 개인적 감정이나 신념이 의사 결정 및 여론 형성은 물론이고 정치 실천의 과정에 훨씬 큰 영향을 끼치는 변화된 시대조건을 뜻한다. 진실이 더 이상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게 된 정치적 상황, 진실 입증의 중요성이 더 이상 부각되지 않는 시대적 동향, 사실적 정확성 여부를 크게 개의치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제조된 단어가 바로 ‘탈 진실’이라 할 수 있겠다.

거대 주류 매체가 제공하는 소위 ‘객관적 사실 보도’에 관한 대중의 냉소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기성 채널을 불신하는 대중들이 대신에 각종 소셜 미디어를 통해 사실과 거짓, 허구와 실제, 픽션과 뉴스, 정보와 선전의 구분이 불분명하고 불가능한 콘텐츠,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유포·유통시킨다. 그중 상당수는 팟 캐스트, 가짜 뉴스 등을 통해 생산된 것일 텐데, 복잡한 순환과정을 거치며 출처는 별 의미 없거나 확인 불가한 것이 되고 만다. 결국 소소의 신뢰성 체계가 해체된 상황에서, 내 마음에 훅 와 닿는 이야기와 내가 믿는 쪽의 정보가 사실, 진실로 쉽게 접수된다. 그러하지 않는 것들은 무조건 거짓, 선전,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논두렁 시계’ 보도가 그런 시세 속에서 유통된다.

‘포스트 진실’은 그런 난폭하고 위험한 현실의 지경, 정치의 교란, 저널리즘의 위기를 가리키는 단어다. 좋은 의미를 지닌 단어가 아니다. 이런 조건을 부추기고 기회주의적으로 고려·활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성 정치인과 제도 정치권, 국가권력이다. 이들은 진실과 무관한,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심지어는 사실과 어긋나고 또 허구에 불과한 이야기들도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면 마구 내뱉어낸다. 사실과 상관없는, 진실의 규명이 불가능한 온갖 싸구려 감정적 수사, 비하의 발언, 욕설과 비속어들을 쏟아낸다. 사람들은 그러한 ‘우리 편’의 저런 감상적 언어에 훨씬 예민하게 반응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이는 진실의 권역을 이탈해버린 말싸움 저질의 정치를 더욱 기성 부리게 만든다. 악순환이다.

불행하게도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된 주류매체의 책임도 빠트릴 수 없다. 기꺼이 기생적 매개 역을 자임하면서, 심지어 가짜뉴스까지 버젓이 유통시키면서, 주류매체는 한때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저널리즘의 위상과 여론대의영역으로서의 정당성을 스스로 치명적으로 갉아먹는다. 국내외에서 확인되고 있는, 공영과 사영 가릴 것 없이 공통된, 끝없는 신뢰성 추락이 그 구체적 증거다. 이 총체적 사태는 조사위나 SBS가 신경 써도 쉽게 극복되지 않을 일. 당장 SBS가 신경 쓸 것은, 자신이 가담한 말 그대로의 치명적 보도에 관해, 그런 보도로써 시청자의 믿음을 배신하며 기레기로 전락한 데 대해, 진실하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그런 저질의 뉴스가 만들어지지 못하도록 자체 저널리즘 시스템을 제대로 쇄신하는 실천적 약속밖에 없다. 그래야 치욕을 씻고 신뢰를 구할 수 있다. 그럴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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