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인 블로거 '디제'님은 프로야구 LG트윈스 팬임을 밝혀둡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을 상대로 1990년대 초반 LG는 결코 약한 팀이 아니었습니다. 특출한 거포는 없었지만, 1번 타자부터 9번 타자까지 극단적으로 짧은 스윙으로 커트하며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간 후, 끊어 치는 타법으로 안타를 집중시켜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선동열을 괴롭혀 패전을 안기곤 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팀은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패전을 당연시했지만, 당시 LG 선수단과 팬들은 선동열이 등판하는 경기라고 지레 포기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현재, 리그 최고의 좌완 투수 류현진을 상대로 LG는 이른바 완전히 호구 잡힌 상황입니다. 오늘 LG는 류현진에게 한 경기 9이닝 최다 탈삼진 신기록인 17개의 삼진을 헌납하며 경기를 내줬습니다. 27개의 아웃 카운트 중 약 2/3가 삼진이라는 의미입니다. 2006년 이래 LG는 거의 매년 류현진에 5승 안팎을 헌납하고 있는데, LG 타자들의 스윙은 평범한 투수들을 상대할 때와 다른 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1990년대 선동열을 상대로 극단적인 끊어 치는 스윙을 시도하면 어떨까 싶지만 리그 에이스를 상대로 변화를 도모하는 모습을 지난 5년 동안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두산과 같이 다른 팀들은 멀쩡히 깨뜨리는 류현진에 LG는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류현진은 LG에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등판하고, LG 타자들은 정신적으로 이미 패배한 채 그라운드에 나서고 있습니다.

2007년 LG의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의 원인이 9월 7일 SK전의 김우석의 낙구로 기억되고 있지만, 실은 시즌 내내 밀렸고 막판에 LG전에 집중 투입된 류현진을 공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류현진을 앞세운 한화는 3위로 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류현진을 넘어서지 못한 LG는 5위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올해 중심 타자들의 해외 진출과 부상으로 그간 한화는 11연패를 당하며 타 팀의 승수 쌓기에 제물이 되었고, 류현진 역시 두산과 기아에 패배를 당하며 연패를 끊지 못했지만, LG전에는 여전히 강합니다.

오늘 류현진을 무너뜨릴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2루타 3개와 홈런 1개가 나왔으니 장타는 의외로 많이 나온 셈입니다. 하지만 중심 타선의 부진이 기회를 무산시켰습니다. 4회말 무사 2루와 6회초 1사 1, 2루의 기회에서 중심 타선은 무기력하게 물러났습니다. 만일 두 번의 기회에서 한 번만이라도 적시타가 나왔다면 류현진을 압박해 투구수를 늘리며 경기 후반 강판시켜 취약한 한화의 계투진을 상대해 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며, 설령 패하더라도 9이닝 한 경기 최다 탈삼진의 치욕은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진영, 최동수, 조인성의 중심 타선이 16타석 15타수 1안타 1볼넷 6삼진에 그쳤기에 류현진은 편안함 마음으로 신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선발 곤잘레스는 외형적으로는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한 듯 보이지만, 6이닝 내내 선두 타자를 출루시키며 불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지난 4월 25일 한화전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지만, 이후 SK전과 두산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대패의 빌미를 제공한 바 있습니다. 즉 타선이 약한 한화라 선두 타자를 줄곧 출루시키고도 2실점에 그친 것이지, 타선이 강한 타 팀을 상대로 했더라면 역시 대량실점하며 무너졌을 것입니다. 곤잘레스에게는 이번 주 일요일 롯데전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큰 기대를 하기 어렵습니다.

기록된 실책은 없지만 오지환의 수비는 오늘도 불안했습니다. 3회말 무사 1, 2루에서 김태완의 타구를 잡은 오지환은 박경수에 토스하지 않고 자신이 2루를 밟은 다음 1루로 송구해 혼자 병살을 연출했는데, 병살로 매듭짓지 못하거나, 자칫 악송구로 대량 실점할 수 있는 위기를 자초할 뻔 했습니다. 4회말 무사 2루에서 신경현의 타구도 내야 안타로 만들어줬는데, 투수가 투구를 할 때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는 본헤드성 플레이가 만든 안타였습니다. 두 번의 실책성 플레이는 실점으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결국 7회말에 사단이 났습니다. 선두 타자 강동우의 타구를 뒤로 흘리며 내야 안타로 만들어줬고, 최진행의 2루타에 강동우가 득점하며 3:1로 벌어졌는데, 상대 투수가 류현진임을 감안하면 오지환의 실책성 플레이가 쐐기점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오늘 경기는 선발 매치업부터 LG의 입장에서는 ‘버리는 경기’였지만, 중위권 싸움을 하는 타 팀들은 류현진의 등판 여부와 관계없이 한화와의 3연전을 모두 쓸어 담는다는 점에서 첫 경기를 내준 것은 뼈아픕니다. 이번 청주 3연전을 리버스 위닝 시리즈로 이끈다고 해도 다른 팀들은 스윕을 했으니 LG의 입장에서는 1경기를 뒤지며 손해를 보는 셈이 됩니다.

야구 평론가. 블로그 http://tomino.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MBC 청룡의 푸른 유니폼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적시타와 진루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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