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적에 아마도 신데렐라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신데렐라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은 못된 계모와 의붓언니 그리고 12시가 지나면 변하고 마는 호박마차 정도뿐이다. 겨우 몇 줄이면 다 정리될 정도인 것이 동화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신데렐라의 전체 스토리가 궁금해진다. 문근영과 서우 그리고 이미숙이 그렇게 원작에 대한 궁금증을 자꾸만 자극한다.

지난주 10회의 엔딩을 온통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문근영의 소름 돋는 연기는 아주 복합적인 감정과 복선을 암시했었다. 생전에 아빠라 부르지 못한 후회는 그리움이 되었고, 잘못했다는 말하지 못한 마음은 통곡이 되었다. 그런 은조에게 효선은 그 모든 그리움을 빚처럼 갚아야 할 또 다른 구대성이었다. 그래서 더욱 독하게 효선을 대하는 은조의 방법론에 제동을 건 것은 효선이었다.

은조의 꽉 막힌 태도에 기분이 상해 공장을 뛰쳐나간 직원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사과의 뜻을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효선은 은조를 막아 세우고 묻는다.

효선 : 네가 날 뭘로 생각하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 혹시 날 버릴 거니? 갈 거니?
은조 : 갈까봐...걱정돼?

부가 되는 말들을 빼면 이런 내용의 대화였다. 결국 은조는 효선의 요구대로 뻗대지 않기로 약속한다. 역시나 아버지 구대성으로부터 들었던 말 "날 버리지 마라"의 바로 연상시키는 효선의 말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아버지 구대성의 몇 마디 되지 않는 말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독하게 작정한 은조를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편 누룩을 빚기 전에 지내는 고사 축문을 받기 위해 절을 찾은 기훈은 3천배쯤을 하고 밤늦게 돌아온다. 그 정도 절을 했으면 걷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집에 다 와서 벽에 기대어 있는데 마침 은조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어디선가 본 익숙한 장면이다. 그러나 8년전 은조가 원격조정 당하듯이 꼼짝 못했던 때와 다르다. 은조의 눈에는 웃는 기훈의 옛날 모습이 겹치지만 차마 다가갈 수 없다. 그를 효선에게 보내야 하니까.

오지 않는 은조에게 기훈이 먼저 발을 떼지만 이내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기훈에게 달려갔던 은조는 이내 기훈의 팔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가슴 아픈 말을 꺼낸다.

기훈 : 나는 이제 정말로 너에게 못가. 못 가게 됐어.
은조 : 나한테 와달라고 한 적 없어. 오라고 한 적 없기 때문에 왜 못 오겠다는 건지 안 물을 거야.


그렇게 각자 가지 못하고, 와달라고 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훈, 은조 모두 각자가 구대성으로부터 받은 치명적인 기억들 때문이다. 자기 때문에 쓰러져 죽어가면서도 '괜찮다'는 말을 한 아저씨 구대성, 엄마가 속이는 것을 알면서도 '괜찮아 내가 사랑하니까'라고 말을 한 아빠 구대성 때문이다. 배다른 아들로 자란 기훈이나 아빠 없이 자란 은조나 그런 대성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알게 된 이상 꼼짝 못할 수밖에 없다.

결국 8년 전부터 줄곧 서로가 고통과 고독으로부터 탈출할 유일한 비상구였던 은조와 기훈은 그 문을 닫게 된다. 8년 전에 그 자리에서 서로를 보듬었던 그들은 그 닫힌 문 바깥에서 막막히 서있을 뿐이다. 그리고 따로 울었다.

그렇게 같이 있어서 오히려 가슴 먹먹한 이별을 겪은 그들은 효선을 대놓고 구박하는 강숙을 피해 도가에서 밥을 비벼 먹으며 행복한 한 때를 보낸다. 그렇게 셋이 만난 이후 처음으로 누구 빼놓지 않고 함께 웃은 유일한 시간이었고, 그 행복은 떠났던 공장직원들이 복귀해 희망으로 발전했다. 이제 강숙만 마음 돌리면 대성이 없더라도 이 가족은 '행복하게 살았데요'하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반전이 숨어 있었다.

은조는 대놓고 구박받는 효선에게 강숙을 잠시 피하라고 구스른다. 이미 효선에게 조금 친절해지기로 한 은조의 거짓말(?)이었다. 안될 것을 알면서도 구박받는 효선이 안쓰러운 탓이었다.

은조 : 내가 부탁할게 잠깐만 엄마 피해 다녀라. 곧 괜찮아질지도 몰라.
효선 : 내가 바보라고 생각해? 내가 어린애니? 안괜찮아져도 돼. 날 쫓아내거나 너랑 엄마가 도망가지만 않으면... 그러면 돼. 날 버리지만 마.

이 말은 얼마 전 길에서 들은 말보다 더 강하게 은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말만 같은 것이 아니라 속까지도 아버지 구대성 그대로였다. 엄마가 미워해도 자기가 좋아하니까 괜찮다는, 전부터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효선의 말은 아버지 구대성이 은조를 변화시킨 말 그대로였다. 은조는 잠시 후 엄마 강숙에게 달려가서 절규한다. 효선이에게 잘 하라고, 정말 무서워 벌벌 떨며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으로 강숙에게 매달린다.

은조는 완전하게 효선에게 졌다. 겉으로야 여전히 차갑겠지만 오래전부터 마음 여린 은조는 효선에게 완벽하게 사로잡혔다.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묵묵히 효선을 지켜주려던 은조였는데 마치 아버지 구대성이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하게 똑같은 효선에게 꼼짝 못하게 돼버렸다.

이쯤에서 고민거리가 생긴다. 효선의 이런 변화는 은조 모녀에 대한 복수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12회 예고에는 완고하게 효선을 구박하던 강숙이 효선의 공세에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강숙마저 효선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면 은조가 말한 "어떻하니 이러다 내가 모두 가지겠어"의 나는 은조가 아니라 효선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고 해서 그것이 복수일 수는 없다. 그러나 잠시 11화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술창고에서 생각에 잠긴 효선은 은조가 했던 말을 곱씹는다. "이러다 정말 전부 내 거가 되고 말겠어 구효선. 그래도 괜찮아?"하는 말이다. 그러고는 일어나 집안 곳곳을 돌아다닌다. 카메라는 조용히 효선을 따라다녔었다. 그러다 마당에 웅크리고 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그런 후에 은조에게 "너에게 나는 뭐니"하고 물었던 것이다.

효선의 변화 정말 복수를 위한 것일까? 아닌게 아니라 앞으로 9회나 남았는데, 이쯤에서 모두 화해하고나면 나머지 이야기는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 구호가 돼버릴 수도 있다. 물론 서우가 악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은 있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효선의 변화에 숨겨진 반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작가가 인간의 깊은 속에 숨어 있는 악마를 시험하려는 유혹에 시청자가 속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데렐라 언니는 연기하는 배우만큼이나 그 뒷 편 작가의 존재가 잘 만져진다. 좋다.

11화 옥의 티와 기훈 휴대전화의 비밀

왼쪽 사진에서 서우는 천정명에게 "우리 아무말 안하고 이렇게 하는 거지"말하며 같이 웃는다. 아마도 원래 콘티는 대사없이 BGM처리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가 음악없이 마치 대사한 것처럼 편집되었다. 오른쪽 사진은 은조가 기훈에게 전화했을 때 발신자 표시에 mmm이라고 된 부분이다. 이 mmm은 스페인어로 mi (나의) majo(사랑스러운) muchacha(소녀) 라는 뜻이라고 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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