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이 대략 마무리 단계다. 아직 모든 일정이 종료된 건 아니지만 북핵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기대는 예상했던 대로 충족되지 않은 모양새다. 서로 체면을 세워주고 정면충돌은 피한 미중정상회담의 결과를 보면 특히 그렇다.

상황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 일정과 성과를 순서대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 중 일본에서의 일정은 일종의 전초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동아시아 순방의 목적이 외교안보전략의 재조정보다는 무역불균형 문제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는 것에 있음을 드러냈다.

9일 오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중 환영행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트럼프 대통령이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미국-일본에 호주와 인도를 더해 중국에 대한 외교안보적 견제를 강화하는 자유로운 인도-태평양 전략을 야심차게 제기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장단을 맞춰주는 정도의 액션만 취했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재가입을 주장하는 아베 신조 총리의 요구를 사실상 일축하고 오히려 미일FTA 협상을 언급해 일본 측을 충격에 빠뜨렸다. 대중국 외교안보 전략의 성격이 가미된 TPP보다는 철저하게 양자 간 이해득실에 맞춘 무역협정 추진을 시사한 것이다. 이 경우 일본은 애초의 기대보다 더 폭넓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애초 어느 정도 예견됐던 바다. 트럼프 정권의 정당성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는 ‘러시아 스캔들’에 대한 특검 수사가 심상찮은데다 동아시아 순방 중 진행된 버지니아 뉴저지 주지사 및 뉴욕시장 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했기 때문에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세계를 경영하는 일보다는 당장 국내의 핵심 지지층에게 정치적 구조신호를 보낼 재료를 확보하는 게 중요한 일이 돼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처지를 잘 헤아려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 순방 본게임의 1차전으로 볼 수 있는 한미정상회담에서 문재인 정권은 한미FTA 재협상과 방위비분담금 재조정 문제를 첨단 무기 구매로 방어하면서 동시에 “스키핑(skipping)은 없다”는 발언을 통해 북핵 문제에 대한 주도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혈로를 확보했다. 이 발언이 나오는 과정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순방 직전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대북제재에 나서기로 한 사실이 일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상황을 트럼프 대통령의 ‘무기 세일즈’로 한국 정부가 군사적 강요를 받은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인식은 사실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내 전시작전권 환수를 추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주국방’이 전제돼야 한다. 가장 시급한 것은 전면전에 이르러 북한이 미사일 발사 등을 감행하는 경우인데, 이 상황에 대한 한국군의 교리는 ‘3축체계’로 표현된다.

3축체계란 킬체인,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 대량응징보복(KMPR)을 말한다. 북한이 기습을 전제한 특이동향을 보이면 이를 사전탐지해 ‘원점 타격’을 감행하고, 미사일이 발사됐을 경우에는 격추하며, 결국 남한 영토가 타격을 받았을 경우엔 강력한 보복을 가한다는 개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찰 감시자산과 요격용 미사일, 강력한 타격수단이다.

한미 양국 정상이 첨단 무기 도입과 미사일탄두중량해제에 합의한 것은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언론이 E-8 조인트스타스와 SM-3 도입을 예상하는 것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 한다. 핵추진잠수함 건조 또는 구매와 관련해 미국과 협력하기로 한 것 역시 북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즉, ‘무기 세일즈’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은 결과인 것이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으로 향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아세안 순방에 나서면서 2차전이 시작됐다. 한반도 비핵화에 원칙적 합의를 이루고 양국이 2500억달러 투자 구매 계약을 체결하기로 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사’가 방중 일정에 있어서도 그대로 유지됐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그들이 ‘신형대국관계’로 부르는대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점을 과시하면서 북한이라는 지정학적 이득을 쉽게 방어해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강하게 압박해 북핵 문제 해결의 전환점을 만들 가능성은 이렇게 소멸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현지시간 9일 미중정상회담 브리핑에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북한 군부 일각까지 포함한 경제 전반에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는 자신들의 판단을 밝혔는데,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현 상황을 유지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협상의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 상태에서 제재 국면이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라면 북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나 ICBM 또는 SLBM 발사 시험을 어떤 방식으로든 감행해 다시 미국과 중국의 개입을 요구하려 들 가능성이 높다.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은 다시 고조될 것이고 한국 정부는 상황에 개입할 수단을 찾기 어렵게 된다.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네시아 조코 위도도 대통령과 함께 9일 오후 보고르 대통령궁 테라타이 홀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의 아세안 순방이 중요하다. 아세안 국가들은 북한과 다양한 방식으로 외교관계를 맺고 있고 한반도 비핵화에 원칙적인 찬성 입장을 갖고 있다. 이들을 북핵 문제의 ‘레버리지’로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은 베트남 다낭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일정 중에 한중정상회담이 예정돼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트럼프 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이 시작되기 전 중국과 사드 경제 보복 정상화에 시동을 걸었고, 사드 추가 배치, 미 MD 가입, 한미일 군사동맹 등을 부정하는 ‘3불입장’을 통해 중국과의 민감한 쟁점사항을 해소해버렸다. APEC 일정 중 열리는 한중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여기서 트럼프 대통령의 순방 일정에서 생긴 북핵 문제 관련 구멍을 메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번 한중정상회담으로 북핵 문제를 단칼에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과 3월 패럴림픽을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도록 할 수는 있다. 지금 상황에선 중국이 모종의 역할을 자임해 내년 2월을 기점으로 북한을 대화의 ‘궤도’에 복귀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로 기록될 수 있다.

이런 일이 현실이 되더라도 남북관계 개선의 첫 걸음을 내딛는 정도의 효과에 그친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으로선 전임 정부가 만들어 놓은 ‘제약’이 야속하고 아쉬울 것이다. 하여튼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고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고도 했다. 그 한 걸음과 첫 술이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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