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서울 남가좌동에 위치한 대학에서 좋은 선배들을 만났다. 그들은 작은 학교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언제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불의에 저항했다. 어떻게 하면 다 같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까 밤낮으로 고민했다. 나도 그런 대학생이 됐고 후배들이 들어오면 그렇게 또 함께했다.

사실 그 무엇보다 행복했던 기억은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준 교수를 만난 일이었다. 그 교수는 좋은 대학,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정책과 제도가 필요한지, 스스로 질문에 답을 찾도록 했고 때론 직접 대안을 주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선배들과 교수를 만날 수 있었던 대학생활은 참으로 의미 있었다.

2017년, 24년이 흘렀다. 리더십 전문기자로서 사회생활을 한 지도 20년이 되어간다. 바쁜 생활 속에 남가좌동의 작은 대학생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 것은 지난 9월4일부터 시작된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의 파업이다.

‘공영방송 정상화’를 기치로 내걸고 방송 파행에 책임이 있는 KBS 고대영 사장 등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며 싸운 지 벌써 두 달 가까이 되고 있다. 지난 두 정부의 언론 통제와 공정성 파괴로 기자, PD 등 수많은 언론인들이 해직되거나 취재 현장에서 쫓겨났다.

사실 이들의 공영언론 되찾기 운동은 9년 전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시작됐다. 그들의 싸움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이미 널리 알려졌다. 지난 2012년 또 다른 공영방송인 MBC 170일 파업으로 해직된 이용마 전 기자는 한 다큐 영화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암흑의 시기에 우리는 침묵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들의 청춘, 인생 다 날아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우리는 침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복막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던 그는 얼마 전 두 쌍둥이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며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지금까지 MBC 뉴스 이용마입니다)>를 출간했다.

MBC 뉴스데스크 보도화면 캡처

지난 9년간 공영방송으로서 KBS의 신뢰도는 급격히 추락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지난 정부의 방송 장악 공작 관련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노조원들은 물론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문제는 KBS와 같은 공영방송의 정상화와 경영진 견제를 책임져야 하는 이사들의 역할이다. KBS는 구 여권(현 자유한국당) 추천 7명과 야권 추천 4명을 포함, 총 11명의 이사들이 있다. 최근 지난 두 정부의 공영방송 파괴 공작 문건이 하나 둘 드러나면서 KBS 공영성 파괴 책임이 경영진은 물론 이들 이사진에 있다는 목소리가 크다.

특별히 눈에 띄는 인물이 구 여권 추천이사 중 한 명인 강규형이다. 그가 현재 남가좌동의 작은 대학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이다. KBS 노조에 의해 KBS의 독립성과 공영성 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소위 언론적폐로 비난 받고 있는 이사 중 단연 대표 인물로 꼽히고 있다. 파업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노조원 옆에서 조롱하듯 V자 인증샷을 찍는 모습이나 이사회 개최를 막는 노조원들 속에서 같이 손을 뻗으며 구호를 외치는 듯 보이는 비상식적인 행동, KBS 정상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 젊은 노조원에게 “현 정부의 홍위병 생활이 창피하지 않느냐”는 막말들… 최근에는 KBS 법인카드 사적 사용으로 업무추진비 유용 의혹도 받고 있다. 언론, 유튜브 등 미디어에 보이는 강 교수의 말과 행동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를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24년 전 남가좌동에서 만났던, 좋은 세상 만드는데 대학생의 가치관과 열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가르침을 주던 교수들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꿈과 비전을 갖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 만들어 보자며 청춘을 바쳤던 시절에 함께 했던 교수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지난 여름 개봉한 다큐영화 <공범자들>를 보면 KBS의 한 기자가 이런 말을 한다.

“언론은 사회의 감시견이다. 문제가 있으면 짖어야지. 왜 잠드는가, 아니 잠든 게 아니라 외면한 거다. 개뼈다귀 몇 개 받아먹으려고… 국민들은 다 알고 있을 거다.”

우리 후배들이 그런 개뼈다귀 몇 개에 인생을 바치는 교수를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과거의 행동을 반성하고 책임 있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아직 늦지 않았다. 졸업생으로서 그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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