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로 인해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던 은조가 마침내 크게 웃었다. 다만 그 웃음이 현재형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전히 은조는 슬픈 아이에 불과하다. 사실 그전에 은조가 효선 삼촌을 끌고 경찰서로 가자고 할 때의 5파전은 지금까지의 신데렐라 언니답지 않게 어설프고 억지스러운 장면이었다. 사전제작분이 동났음을 감안한다 해도 신언니의 조밀한 구성력에 어울리지 않는 허술한 연출이었다.

그렇지만 은조가 뛰쳐나가게 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기에 너그러이 눈감어 주기로 한다. 처음에 그렇게 은조가 달릴 때에는 기훈이가 따라갔었다. 이번에는 정우다. 기훈이는 은조를 업어치기로 쓰려뜨렸지만 그림자사랑 정우는 숨찬 은조를 안아 들고 대신 달렸다. 그렇게 은조가 달렸다. 처음에 한 팔만 정우에 목에 걸더니 한참을 달리니까 두 팔로 정우 목을 꼭 안는다. 그렇다고 절대로 흔한 연애소설의 로맨스 따위로 비약하지 않는다. 은조니까.

그렇게 가슴이 풀릴 때까지 달리고 정우는 은조를 풍경 좋은 강변에 앉히고 춤을 춘다. 울라울라 짱구춤부터 침팬지 흉내까지 낸다. 그 모습에 은조가 웃었다. 이번에는 표정 숨기지 않고 웃음을 다 드러냈다. 그렇게 웃는 은조의 눈에 8년 전 어린 정우의 모습이 보인다. 눈 앞에 춤추는 훨친한 정우가 아닌 뚱뚱하고 못생긴 정우가 뒤뚱뒤뚱 춤을 추고 있다. 은조는 더 크게 웃는다.

그러나 은조의 웃음은 현재 진행형이 아니다. 은조의 웃음은 저 멀리 과거로부터 온 것이다. 정우는 그동안 단절되었던 과거 시간들이다. 은조는 정우를 통해서 과거에 잃었던 웃음을 찾아왔다. 누구에게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웃음을 잃었던 시간들로부터 비로소 찾아왔다. 덮어 놓은 시간들로부터 정우가 찾아와 은조에게 준 선물이었다. 이유가 어떘든 은조가 한 때나마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만 그 웃음도 잠시, 은조는 또 다시 위기의 대성도가를 위해 웃음기를 지워야 했다. 제일 먼저 대성을 배신하고 있는 엄마 강숙에 대한 경고였다. 낮은 목소리로 은조는 강숙에게 최후통첩을 한다. "효선이 아버지한테 못할 짓 하면 엄마 나, 내가 엄마 대신 지옥 갈 거야. 지옥이 엄마하고보다 훨씬 더 견디기 쉬울 거야. 진심이야"한다.

은조의 슬픈 거짓말들

이 말은 그동안 은조가 방어기제로써 다른 사람에게 과장된 공격성을 보인 것과는 다른 진심이다. 그 동기를 대성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은조는 숨 돌릴 새도 없이 또 다시 또 다른 대성인 효선을 지켜야 했다. 기훈을 좋아하는 효선을 위해 기훈에게도 역시 "나, 이 집에 빚 엄청 많은 사람이야. 이 집에 해끼치려는 사람 있음 다 죽여버릴 거야. 효선이한테 나쁘게 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한다.

물론 이 말은 반쯤은 거짓말이다. 강숙에게는 마지막에 한 "진심이야"라는 말도 없었듯이 기훈에 대한 말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효선에 대한 의무감의 자세만은 진심이다. 말은 빚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은조의 말투일 뿐 대성에게 열려가는 마음이 시킨 일이다. 그런데 은조의 거짓말은 또 이어진다.

대성은 은조에게 아버지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참 은조가 바라던 말이고, 부르고 싶은 이름이었지만 정작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꾸 시키시면...저 일어나야 해요"였다. 이것 역시 거짓말이다. 아니 거짓말이라기보다는 기훈이 떠났을 때처럼 아버지란 말은 불러본 적 없는 이름인 탓이다. 기훈이란 이름 대신 은조야 은조야 자기 이름을 불러야 했던 은조인 탓에 아직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은조의 거짓말은 두 가지 모두 슬프다. 본인도 그렇겠지만 그 속내를 알고 있는 시청자를 더 슬프게 한다. 은조가 차가워질수록, 은조의 방어기제가 단단해질수록 은조는 더 슬픈 아이가 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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