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류 정치세력들의 도를 지나친 견제와 보수언론의 지독한 검증공방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바보’ 노무현의 대한민국 대통령 만들기는 전국민이 함께하는 상상력의 게임이 될 수 있었다. ‘노무현’이라고 하는 상징에 보통사람들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희망의 가치를 등치시켰다. 그리고 그 상상력의 힘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인터넷에서 비롯된 그 희망과 긍정의 상상력은 IMF 경제위기 이후 온갖 고통 속에 짓눌려 왔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생기와 활력을 되돌려 주었다. 2002년 월드컵 대회는 그 활력의 가공할 위력을 전 세계가 확인한 시기였다. 한국축구가 세계 4위에 오르고, 전 국민의 응원 열기는 유럽과 남미의 그것을 압도하며 세계 1위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 가슴 벅찬 상상력의 승리선언은 대한민국이 2002년을 넘어 21세기 세계의 주역이 될 것임을 알리는 당당한 외침이었다.

그로부터 5년 후, 대한민국은 마침내 마의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를 돌파했다. 무역규모로는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 얼굴도 내 주변 사람들의 얼굴에도 다들 고통스러운 표정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희망이니 꿈이니 하던 그 불같은 열정은 도저히 찾아보기 힘들다. 증오와 분노, 그리고 짙은 죽음의 그림자만 우리주변을 떠돌고 있다.

도대체 ‘국민소득 2만 불 돌파, 세계 11위의 교역대국’이란 말과 하나의 시공간에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이 끈적끈적한 좌절과 절망의 기운은 뭐란 말인가? 지난 5년의 시간 동안 우리에게 다가온 이 이상한 역설의 실체는 무엇일까?

빼앗긴 상상의 시간

다음의 기사는 이 이상한 역설의 실체를 더듬어가는 단초가 될 수도 있겠다.

▲ 12월10일 KBS <뉴스9>.
“이른바 인터넷 선거 혁명이 일어났던 지난 2002년. 사이버 공간은 젊은 층과 진보 세력의 독무대였습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우선, 젊은 층의 보수화가 급속히 진행됐고 특히 5,60대 장년층의 사이버 공간 진입이 지난 대선에 비해 크게 늘었습니다. 인터넷 매체의 지형도 바뀌었습니다. 보수 성향 매체인 데일리안이 페이지 뷰에선 진보 매체인 오마이뉴스를 앞선 때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터뷰>배영(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 "페이지뷰나 방문자수는 해당 사이트가 얼마나 유인력이 크고 활성화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라는 점에서 이번 대선과정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지닌 매체들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태풍의 눈이었던 노사모는 활동력이 약화됐고 중심 인물들은 각 캠프로 흩어지거나 인터넷 정치판을 떠났습니다.

<인터뷰>박옥균(전 노사모 회원): "열심히 지원 활동을 벌이고 자기 돈 써가면서 했는데 실제 정치인들은 그것을 이용하려고만 했지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12월 10일, KBS 9시 뉴스 “뒤바뀐 ‘인터넷 선거지형’…진보에서 보수로”의 기사 중)

2001년 ‘바보’ 노무현의 대통령 만들기 신화에 참여하며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치던 이들은 이제 인터넷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의 열정과 꿈을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철저히 ‘이용하려고만 했지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돼지저금통에 희망의 상상력을 담아 건넸던 이들은 희망도 상상력도 모두 빼앗겨 버렸다.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개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했고, 비정규직법안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실직당할 권리만 보호해주는 법안으로 바뀌어 버렸다. 수많은 농민들의 피고름으로 씌여진 한미FTA 반대 깃발은 찢겨나갔고, 고 김선일씨의 안타까운 희생에도 불구하고 자이툰 부대는 파병되었다. 그리고 참여정부는 올해 마지막 임시국회에서 한미FTA 비준과 자이툰부대 파병연장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았다.

▲ 한겨레 12월11일자 1면.
빚질 깜냥조차 없었던 가장들은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에 집을 갖기를 포기해야 했으며, 집값상승에 덩달아 널뛴 전세금 때문에 도시에서도 떠밀려 나가야 했다. 공교육을 대체한 사교육의 막대한 가계지출 부담은 2세를 출산할 의욕조차 꺾어버렸다.

5년 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상상력이 이런 끔찍한 악몽을 뒤바뀔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들이 오히려 현실이 된다. 화려한 부정부패의 이력쯤은 대통령의 자격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었으며, 막대한 금권을 바탕으로 역사 속에 사라져 버렸던 황제와 황족도 부활했다. 삼성제국(!)

다시 되찾아 와야 할 상상력

우리가 상상했던 신화는 결코 한사람의 잘나가는 고졸 출신의 변호사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게 아니었다. 우리의 생존을 담보로 ‘2만 불 국민소득, 세계 11위 교역대국’을 구걸하는 게 결코 아니었다. 세계일류의 족벌기업을 만들기 위해 정부까지 동원된 부정과 편법의 성공신화는 정말 바라지 않았다.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 통일한국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 구축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겠다는 수구세력의 자폐적 슬로건이 다시금 이념갈등의 깃발이 되리라는 것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니 내가 5년 전에 고졸 출신의 대통령을 상상하면서 바랬던 세상은 학력 때문에 자아실현의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고, 지역이 소외되지 않으며, 북한과 함께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여 항차 세계 평화와 번영이 한반도에서 시작되는 그런 세상이었다. 우리의 2세들이 살아갈 세상을 착취하기만 하는 고도 경제성장의 신화을 넘어 우리의 2세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넘어 전 세계의 인민들과 함께 풍요로운 자연과 노동의 성과를 공유하는 그런 세상이었다. 국가주의와 이윤추구로 무장한 닫힌 문화산업을 넘어 서로 다른 역사의 지혜를 가진 세계의 여러 민족들과 함께 새로운 문화적 실천을 공유하는 그런 세상이었다.

아직 우리가 꿈꿀 시간은 많이 남아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상상으로 만들어 갈 세상도 여전히 지금 내 앞에 있다. 무엇부터 상상할 것인가?

지금 나는 내 상상마저 권력과 자본에 뺏기지 않을 방법을 상상하고 있다. 당장 참여정부에 의해 개정된 공직선거법 제93조 후보자, 정당에 대한 블로그 포스팅, 댓글, UCC 제작배포 금지 등을 넘어서 내가 상상하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갈 대통령 후보에게 도움을 줄 방법을 ….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만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대학시절의 고민을 놓치 못한 채 공영방송에 입사했지만, 공영방송에서 조차 이 고민을 다 담지 못하고 이제 두 딸아이의 미래를 위한 나름의 헌신과 실천을 고민하는 생태주의자 ‘고니아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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