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불에 탄 여성, 그 여성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빛의 남성, 그리고 폐허가 되어버린 집에서 시작된다. 화재로 인해 전소가 된 그곳은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 회복되어 가고, 그곳에서 한 여성(제니퍼 로렌스 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옆의 잠자리의 남편을 찾던 그녀는 남편의 흔적을 찾아 온 집안을 헤매고 현관 앞에서 홀로 시간을 갖던 남편(하비에르 바르뎀 분)과 조우한다.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1969년 생의 하비에르 바르뎀과 1990년생의 제니퍼 로렌스가 분한, 그래서 이 집을 방문한 이들이 '아버지'와 '딸'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 부부가 이 집의 주인들이다. 그리고 이 세월을 건너뛴 듯한 오묘한 부부의 조합이 영화 초반 보인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장면과 함께 영화 <마더!>의 거대한 복선이 된다.

영화 <마더!> 스틸 이미지

하지만 이보다 더한 복선은 이 영화가 <블랙 스완>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 아닐까? 한 줄의 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심하는 남편, 그런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화재가 났던 집의 복구에 헌신하는 아내의 평온한 일상. 하지만 대런 감독이 뉴욕 발레계를 배경으로 성공의 세계관을 내면화하여 그로 인해 자신을 파괴해 가는 한 여성 니나(나탈리 포트만 분)와 그 여성을 가혹하게 혹은 소모적으로 소용하는 예술 감독 토마스 리로이(뱅상 카셀 분)의 <블랙 스완>을 기억한다면, 이미 그 자체로 <마더> 속 평온한 부부의 일상은 불온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스럴러 아니 그보다는 호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 외딴 집에 불현듯 찾아온 낯선 중년의 남성(에드 해리스 분). 이 이방인에 대해 경계하는 아내와 달리, 그가 자신의 시를 알고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은 방을 내주고, 과음으로 인해 몸을 추스르는 못하는 그의 시중을 드는 등 과도한 '환대'를 한다. 아내는 남편과 자신이 이룬 평화로운 가정의 일상이 흔들리는 것에 불안을 느끼지만, 남편은 마치 그런 아내가 지켜내려 했던 평화로운 일상이 써지지 않는 시에 대한 강제라도 되었던 양 일상을 깨뜨리는 이 혼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니 보다 솔직하게는 아내와의 평화로운 일상에서 한 줄도 써지지 않던 시가 이 낯선 손님의 파격을 통해 '구원'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손님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아내와 아들들의 '다짜고짜'식의 방문, 그리고 뜻밖의 사고는 이 집의 주인이 누구였는지조차 모호하게 이 가정을 '공용'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준 남편과 달리 그 속에서 아내는 혼돈스러워하며 '가정'을 지키려 한다.

남편의 시, 그리고 아내의 가정

영화 <마더!> 스틸 이미지

<블랙 스완>에서도 그랬듯이 대런 감독은 <마더!>에서도 현모양처처럼 순종하며 남편의 처분을 바라는 아내에 대비하여 방문객의 아내(미셀 파이퍼 분)를 등장시킨다. 마치 시바 여신처럼 관능적이고 파괴적인 그녀는 그녀의 '편애'로 말미암아 두 아들을 파멸로 이끌고, 그들이 방문한 집마저 난장판으로 만들고야마는 그 장례식의 순간까지도 모성의 주도권을 놓지 않는다. <블랙 스완>에서 화이트 스완이었던 나나가 변모하듯이, 현모양처로 처분만 기다리던 아내는 그 자신의 집을 흔들어 놓았던 그 모성에 충동을 받아 남편을 도발하고 '잉태'를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외부인을 통해 자신의 시를 길어 올리려던 남편은 정작 '아내의 잉태'를 통해 샘솟듯 영감이 떠오르고 10년 만에 신작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어쨌든 그 낯선 가족의 방문의 결과 '아이'를 얻고 '시'도 얻게 된 부부. 하지만 그 영광은 가정으로 수렴되는 대신, 남편의 분에 넘치는 명망과 그리고 그 와중에 가정을 지키려는 아내와 아이의 처참한 희생을 초래한다.

영화 속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마치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부부 관계를 보는 듯하다. 170cm가 넘는 장신의 이 부족 남자들은 말과 소의 피를 먹으며 전사로서 길러지지만, 정작 그들의 일상을 채우는 건 마사이족 여성들의 '가사노동'이다. 언젠가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만 대비하며 빈둥거리는 남자들과 달리, 마사이족 여성들은 가사와 육아, 농사일까지 담당하며 가정을 책임진다. 그렇게 영화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규정짓는다. <마더!>를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 속 그녀가 엄마가 되는 건 영화가 시작되고서도 한참 지나서이다. 오히려 영화 속 마더는 남성이라는 체제의 보호자로서의 '여성'이다.

영화 <마더!> 스틸 이미지

그처럼 남편은 '시'를 위해 아내의 사랑을 먹으며 살아간다. 아내는 집을 손보고 가사를 돌보며, 그를 뒷바라지한다. 그녀의 소망은 남편과 함께 아이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가정은 '시'를 잉태하는 영감이지만 배경일 뿐, 그의 관심은 '시'를 매개로 한 세상 속 자신에게로 향한다.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아들을 희생하고, 결국 아내를 제물로 삼아서까지.

평화로운 한 부부의 일상으로 시작된 영화는, 이해관계를 달리한 부부가 잉태하여 생산한 아이와 시를 계기로 대런 감독이 생각한 '세계'에 대한 담론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가장 추상적인 인간 사고의 산물인 '시'를 통해 입신양명하는 남편과, 가장 구체적인 인간의 생산물 '아기'를 통해 남편과 여성의 이해를 엇물린다.

아내가 집이라는 구체적 공간, 그 속에서 이루어진 남편과 아내, 아기라는 '가족' 단위에 대한 로망을 놓지 못하는 반면, '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 남편은 그 욕망을 '전지전능한 지배욕'으로 펼쳐낸다. 일찍이 아내의 동의 없이 외부인을 기꺼이 집으로 맞이하여 칭송받았던 그는 자신의 아들조차 강탈하여 '제물'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욕망에 대한 화답한 바깥세상은 그를 영감의 지도자로, 나아가 종교적 신망의 대상으로, 이 시대 인간의 정신이 낳는 모든 행태를 드러낸다. 그저 그의 시가 좋다 찾기 시작한 사람들은 극성 열혈 팬이 되었고, 영감의 교도가 되었고, 과격한 극렬사상 집단으로 변모해 간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테러와 유혈과 진압을 초래한다.

사랑을 기반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기를 생산하려는 '모성성'은 철저히 남성의 세계 속에서 소모되고 희생된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 중후반부터 벌어지는 난장을 통해 그 추상과 허명에 집착한 남성의 세계가 도래하는 건 '폭력'밖에 없다고 일갈한다. 심지어 그 폭력의 세계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듯, 여성의 '희생'을 통해 끊임없이 재부팅되고 있다고 방점을 찍는다.

인간의 역사라 쓰고 남성의 역사라 읽고 팠던 대런 감독

영화 <마더!> 스틸 이미지

대런 감독의 <마더!>는 '인간의 역사'라고 쓰고 '남성의 역사'라고 읽어야 하는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 속에서 남편으로 상징되는 남자들은 <블랙 스완>의 리로이만큼이나 여성을 소비하고 소모하며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이어가고자 한다. 잠시 등장했던 미셸파이퍼의 또 다른 '마더'는 남성의 권력으로 이어진 강고한 위계질서의 강렬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조력자일 뿐이다. <차이의 정치와 정의>의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결국 지배와 억압으로 귀결될 뿐'이라는 정의처럼. 마지막 보다 젊은 마더로 ‘리뉴얼’되는 아내로 마무리하며 폭력으로 귀결되는 남성의 역사를 담론화 하였다.

<마더!>에 대한 호불호는 이 정체모를 영화가 나아가는 궤적에 대한 이해와, 대런 감독이 펼쳐 보이는 상징적이면서도 도식적인 담론이 21세기에도 유효한가에 대한 공감 여부로 귀결될 것이다. ‘한 성의 또 다른 성에 대한 지배’로 규정된 역사로 상징되는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남성과 여성에 대한 '규정적 역할론'에 매몰되어 있다. 지배와 억압으로 도식화한 인간의 역사는 지난 세기까지는 충분히 그런 성역할로 규정받을 수 있다지만, 21세기의 담론으로 등장한 이 영화는 과연 21세기에도 그 성적 역할론이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그러기에 오히려, 차별의 역사를 논하고자 하는 바가 남성과 여성을 '본투비 외향적 남성성'과 '본투비 사랑순종주의의 여성성'으로 규정하는 역설적 차별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지배와 억압의 도식이 낳은 자충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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