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신고리공론화위원회 발표에서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 의견이 59.5%로 공사 중단 의견인 40.5%를 19%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원자력발전 비중 확대·유지·축소 관련 조사에선 원자력발전 축소가 53.2%로 유지(35.5%)나 확대(9.7%)를 선택한 의견보다 높았다.

발표 전 보수언론은 공론화위라는 모델을 ‘비전문가 판단’, ‘여론몰이’, ‘포퓰리즘’으로 몰아붙였다. 발표 후에도 여전히 그 기조를 유지한 채 공사를 중단하면서 발생한 비용의 책임을 문재인 정부에 묻고, 탈원전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한편 진보언론은 발표 전 숙의민주주의의 필요성과 적합성을 주로 설파하다가, 발표 후에는 원자력발전 축소 의견이 높았던 것에 의미부여를 하는 모양새다.

위의 두 관점에 대해선 이미 여러 언론에 나왔으니 상세히 적지 않기로 한다. 또한 이번 공론화위의 진행과정이 ‘숙의민주주의의 모범’이었는지 혹은 보완할 부분이 있는지 여부는 보고서를 상세하게 검토해야 알 수 있겠기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따져봐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번 결정이 한국 보수와 진보담론에 던진 경종이 무엇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13일 충남 천안 계성원에서 열린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 2박3일 종합토론회에 참석한 시민대표참여단 471명이 토론회 방식과 진행 경과보고를 듣고 있다.(MBN 관련 보도 화면 캡처)

보수, ‘전문성의 위기’에 빠졌다

보수언론의 질문은 잘못 되었다. 전문가를 국민이 신뢰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개탄할 게 아니라,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전문성의 위기’ 문제에 대면해있다.

사람들이 보수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돈이나 권력에 매수되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과를 바꿔주는 전문가’나 ‘그런 이들을 매수하는 권력자나 재력가’에 해당한다. 이 이미지는 부당한 것일까.

지난 몇 년 동안의 사례만 일별해도 사정은 그렇지 않다. 박근혜 정권 말 시위현장에서 사망한 백남기 농민의 사인이 ‘병사’였다가 정권 교체 후 ‘외인사’로 돌변한 것이 한 사례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아들인 박주신씨의 병역비리 의혹을 주도하는 차기환 변호사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서 진행한 공개 MRI 촬영이나 이를 근거로 판결을 내린 법원 판결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이런 사례를 들어보자면 한도 끝도 없다. 정치적 문제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이렇게 전문성의 영역을 훼손하는 이들이 해당 영역에서 어떠한 징계를 받는지도 알려진 바 없다. 법적 처벌을 요하는 수준이 아니더라도 전문성 훼손에 대해선 전문가 집단의 엄정한 자체 징계가 있어야 하는데, 알려진 바 없다. 보도된 것들로만 보면 오히려 감싸고 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원전마피아’나 ‘핵마피아’ 같은 말을 만들고 그들을 불신하는 원인이 이렇다. 보수언론은 흔히 ‘선전선동하는 급진적 운동세력’과 ‘국민의 미개함’을 탓하지만 그런 조건은 외국에서도 동일하다. 한국의 전문가들이 신뢰받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전문가 집단 내부에서 찾아야 마땅한 것이다. 의사나 법조인들이 한통속으로 박원순을 편들고 있다고 믿은 차기환 변호사도 못 말리면서, ‘원전마피아’를 의심하는 대중을 원망할 수는 없다. ’정파적 이유로 막 나가는 전문가‘도 전문가 집단 내부 윤리로 통제가 안 되는데, 전문가 말을 무조건 신뢰하라고 할 방도가 없다.

만일 내가 엘리트주의적 보수주의자라면, 이러한 조국의 상황이 너무나 우려되어서 밤잠도 안 올 것이다. 전문가에 대한 신뢰가 붕괴한 사회에서 어떠한 사회적 비용이 초래될지가 뻔하기 때문이다. 차기환 사례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언론사를 다니고 있다면 집중 기획취재를 해서라도 전문가 집단의 윤리를 세우는 방책을 모색하려 했을 것이다. 전문가 집단 내부의 자성을 촉구하고, 집단 내부의 윤리의식 고양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면 법적·제도적 개선 방안이라도 모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한가하게 문재인 정부나 운동세력이나 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별로 우려되지 않는 모양이다. 실은 언론사 스스로도 전문성을 침해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한다. 가령 며칠 전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월간조선 문갑식 편집장의 <검찰의 '최순실 태블릿' 보고서가 보여준 진실 (링크)>이란 글을 보자.

조선일보 스스로도 열심히 파헤친 ‘최순실 게이트’ 보도에 재뿌리는 이런 글을 올리면서까지 특정 독자층에게 아부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몇몇 문제제기는 터무니없을 정도다. 문제의 태블릿PC가 김한수 전 행정관 명의로 개통하여 최순실이 실제로 사용하던 것이란 건 법정에서 김한수도 증언한 사실이다. 그리고 문건의 사전 유출이 있었다는 사실은 정호성 전 비서관도 인정했다. 이런 사실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음모론의 군불을 뗀다. 주간조선 보도 내용도 나오는 등 나름의 보도 내용이 있는 듯 하지만, 마침 태블릿 PC 보도 일주년이 코앞이니 JTBC에서 알아서 반박할 것으로 기대된다.

진보, ‘지성의 위기’에 빠졌다

한편 진보담론이 처한 위기는 더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보수가 ‘전문성의 위기’에 대면하고 있다면, 진보는 그를 넘어 ‘지성의 위기’에 대면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수에 대해선 ‘알고서도 속이는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진보에 대해선 ‘뭘 모르는데 떠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 본다. 그렇기에 ‘지성의 위기’다.

19%의 차이가 난 최종결과보다 그 추이가 더 문제로 보인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8월25일에서 9월9일까지 실시된 2만명 대상 1차 여론조사에서 재개 대 중단은 36.6% vs 27.6%로 9% 정도였다. 478명 시민참여단은 이 비중대로 구성했다. 그랬던 것이 10월 13일 2박3일 합숙 첫날에 실시된 3차 투표에선 44.7% vs 30.7%로 14% 차이가 나게 된다. 또 합숙 마지막날 실시된 4차 투표에선 57.2% vs 39.4%로 16.8% 격차가 되고 최종 투표에선 더 벌어졌다.

말하자면 토론하면 할수록, 찬반양측에서 제공한 자료를 보면 볼수록 더 벌어졌다. 숙의의 결과가 환경운동단체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원자력업계 측에선 ‘환경운동단체들이 명백하게 날조된 자료를 갖다주는 것도 막지 않았다’면서 조사 과정의 편향성을 고발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함부로 이들을 보수적인 이들이었다고 매도할 일도 아니다. 핵발전 축소에 대한 의견은 같은 기준에서 토의가 진행될수록 높아졌기 때문이다. 2만6명 여론조사에선 39.2%, 478명 시민참여단의 첫 투표에선 45.6%였던 축소에 대한 의견이 최종적으로는 53.2%까지 상승하게 된다.

물론 ‘진보와 운동권은 선전선동을 한다’는 보수파의 선전선동에 왜곡되거나 날조된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환경운동을 넘어 최근 한국 사회의 진보파 전체가 담론의 영역에서 오래 논의되면 반대파의 주장보다 설득력이 있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이십여 년만 봐도 한국 사회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지만, 진보 담론의 혁신은 그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 발전과 혁신의 격차 속에서 ‘주류담론’에 대한 정교한 비판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진보운동은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공포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논리를 구성했다.

이는 말하자면 ‘딱 십분 설명하게 했을 때 사람들을 곧바로 내 편으로 끌어올 수 있는 최적화된 설명법’이다. 이렇게 해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기는 어려울지라도, 15~25%의 지지는 쉽게 끌어올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형성된 논리가 ‘숙의’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우 엄정하게, 이번 결과가 ‘직접민주주의가 진보적인 결과를 낳지 않을 위험성’을 보여줬다고 말할 게 아니라 ‘진보 담론의 부실함이 숙의에 의해 폭로되었을 가능성’을 직시해야 한다.

그나마 민주당 대선공약에 연동된 사안이라 엇비슷한 찬반으로 시작했기에 19% 차이로 끝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정의당·노동당·녹색당 공약이었을 뿐이라 사람들이 생각했다면 훨씬 참담한 결과가 나왔을 거라 생각된다. 나는 진보담론이 적어도 이 객관적 사실을 인지해야만이 위기를 벗어날 최소한의 실마리가 보일 거라 생각한다.

숙의가 필요한 때, 숙의가 가능한 사회를 만들려면

그렇다면 원론으로 돌아와 숙의민주주의를 더 진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정치권과 언론의 책임이 크다.

먼저 정치권에선, ‘보통의 유권자도 숙의가 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숙의민주주의는 보통으로 교육받은 시민들이라도 충분한 자료를 접하고 시간을 가진다면 집합적으로 엘리트들의 경멸하는 ‘대중’보다 훨씬 이성적으로 훌륭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이념이다. 이번 결과는 그 이념이 한국 사회에서 현실로 드러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을 현실적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시민들이다. 노동시간이 길고 삶이 팍팍한 한국 사회에선 더하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이 숙의할 수 없는 세상을 살게 될 경우, 그들은 숙의민주주의의 결과와 일반 여론조사 결과에 나타나는 ‘격차’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그들 역시 숙의한다면 그와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량을 믿지 못하고 시민참여단이 누군가의 선전선동에 세뇌되었거나 애초부터 정치적으로 오염된 층이었다는 식의 망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은 보통 사람들이 숙의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력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에 관한 한 더 큰 책임을 지는 곳이 언론이다. 언론은 유권자가 숙의할 만한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이른바 공론의 역할이 그것이다. 전문적 논의를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고, 다른 영역의 전문성이 부딪힐 경우 그것을 적절하게 비교하고 논평할 수 있어야 한다. 각 전문영역의 세계와 생활인의 세계에 놓여진 교량이 되어야 하며, 그 교량을 넘나들도록 시민을 인도해야 한다.

물론 SNS시대의 매체환경은 점점 더 이러한 일을 어렵게 만들며, 언론사는 점점 더 다만 생존을 위한 노력도 벅차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시민들에게 SNS만 보지 말고 언론을 봐달라고 말하는 것도 무의미해진다.

특히 보수정치권, 보수담론보다 진보정치와 진보담론이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숙의하는 시민은 언제나 진보의 편은 아니겠지만, 엘리트나 전문가와의 연합으로 충분한 보수에 대항할 수 있는 이들은 이들 뿐이다. 진보언론 스스로 먼저 ‘숙의하는 시민’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 진보언론이 그와 같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을까. 회의감이 든다. 조선일보가 ‘태극기’ 구독층을 벗어나지 못해 아부를 한다면, 진보언론 역시 SNS로 파편화된 이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한다.

물론 그들에게 너무 많이 당해서 그런 것이므로 인지상정이기는 하다. 하지만 대안언론과 SNS와 거기서 각광받는 셀럽들에게로 진보담론의 헤게모니가 급격하게 기울어지는 이 현실은, 애초 진보언론이 그들과 구별되는 기품과 지성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냉정한 평가도 필요하다.

비록 그 헤게모니의 이동이 언론종사자의 입장에선 ‘개악’으로 보일지언정, 어떤 소비자에겐 ‘김빠진 사이다’에서 ‘맛있는 코카콜라’로 갈아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우리는 사실 ‘사이다’ 흉내도 종종 냈지만 영양제였어요”라고 답변하는 것 이상의 향후 비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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