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꽃펴보지 못한 젊음들이 의무와 법의 강제란 이름으로 집총했다가 차가운 물속에서 하나 둘 스러져 갔다. 익히 예상은 했지만 사고 이후 한동안 뿌옇게 부유했던 죽음은 함미가 인양되고 주검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더 이상 부인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실체가 되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어야 했던가. 그 물음에 대답해야할, 그들을 차출했던 국가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런 와중에 침몰 사고의 원인과 정부의 대처에 대한 온갖 의혹과 정치적 해석이 난무하고 있다. 보수 신문은 사건 초반부터 별다른 근거도 없이 북한 공격설을 제기하며 안보를 상업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익히 예상했던 대로다.

▲ 천안함 사고 다음날인 3월 27일 개최된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 ⓒ청와대 홈페이지
반면 진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안보 상업주의의 대척점에서 북한 연계설의 여론 확장을 막는 안티로서의 존재감 밖에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안티로서의 존재감마저 또렷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들의 예상과 달리 MB가 보수 신문의 안보 상업주의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걷고 있어 대비의 명확성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이달 5일자에 'MB가 옳다'는 제목의 칼럼을, 한겨레신문은 6일자에 'MB가 이상하다'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두 글은 모두 침몰 사고 초반 북한의 연계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MB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칭찬하는 뉘앙스를 띄었다. 한겨레는 이틀 뒤 청와대 출입기자의 기사에 대해 네이버 인터넷판 제목을 'MB가 이상하다2'로 달아 칼럼과 궤를 같이 하는 후속 기사인양 편집하며 칼럼에 힘을 실었다.

언론뿐이 아니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는 1일 한 라디오에 출연해 "이 대통령이 신중한 자세로 잘하고 계신다"고 칭찬하고 나섰다. 진보는 비판할 땐 하지만 무조건 안티만 하는 게 아니라 잘할 땐 박수도 칠 줄 안다는 뜻을 피력하고 싶어서 일까, 아니면 극단적이고 꽉 막힌 보수와 달리 진보는 열린 소통과 관용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주장하고 싶었던 걸까.

'관용' 스탠스에 담긴 진보의 자화상

하지만 이 '관용'의 스탠스에는 진보의 자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진보 보수의 프레임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과거의 진영 논리, 즉 보수라면 분명 '북한 연계설'로 몰아갔을 것이란 가설을 전제로 MB의 행동을 미리 짐작했다가 반대의 행동이 등장하자 당혹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근거도 없이 고집스레 '북한 연계설'을 주장하는 보수 언론만큼이나 80년대 운동의 관성으로 천안함 사고를 '북한과의 연관성'이란 잣대로만 진영을 좌와 우로 나누는 행태도 상당히 과거 회귀적이라고 할 수 있다.

▲ 경향신문 5일자 30면
하지만 MB가 천안함 사고의 북한 연계설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보였던 건 그럴 수밖에 없어서다. MB를 칭찬했던 일부 진보 세력들이 본 것처럼 MB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직책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말의 무거움을 알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북한이라는 국가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춰서 그런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MB는 지극히 예상대로, 그의 소신 행보를 걸었다. 그래서 MB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천안함 사고는 MB에게 상당히 곤란한 일이었을 것 같다. 자신을 '대한민국 CEO'라고 칭하며 자본의 축적으로 세계의 여러 나라 'CEO'와 경쟁해야한다고 생각하는 MB에게 안보와 그에 따른 남북관계의 역사의식은 사실 거추장스러운 겉치레일 뿐이다. MB의 그런 인식의 단면은 한국 사회에서 과거사에 대해 민감한 폭발력을 가진 대일 관계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는 2008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과거를 잊을 수는 없지만 과거만 가지고 오늘과 미래를 살 수 없지 않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그에겐 역사의식보다 중요한 건 자본의 자유로운 거래와 유치이고, 궁극적인 착점은 거래와 유치가 야기할 팽창의 경제학이다. 이때 '북한의 공격로 인한 천안함의 침몰'이라는 사건은 MB에게 악몽과도 같다. 외부의 투자에 목매는 CEO에게 '자본이 회수될지 여부를 알 수 없는 불안한 국가(기업)에 누가 투자를 할 것인가'라는 걱정만큼 전전긍긍의 대상이 따로 있을까.

'북풍'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선거 직전의 안보 이슈가 더 이상 '북풍'을 일으키기 힘들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 대중은 2002년 6월 '제2차 연평해전'이 발발했을 때 광화문에서 혹은 TV를 보며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었다. 월드컵 축구라는 국가 간 대리전쟁의 장에서 대한민국을 부르짖으며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던 대중이, 실전의 전쟁터에서 실체로 확인된 대한민국 병사들의 죽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는 괴리를 보여줬다. 이는 더 이상 대중이 국가와 민족의 실체라는 걸 총체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 같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대중이 외쳤던 '대~한민국'은 실체로서의 한국이란 국가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IMF 구제금융 이후 자신들을 생존 경쟁이란 자본의 정글에 내동댕이친 뒤 아무런 보호막이 되어주지 않았던 국가는 대중에게 더는 숭배해야할 유의미한 실체가 아니다. 억눌렸던 대중에겐 그저 광장을 뒹굴며 함께 쾌락을 느낄 공통의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다. 개인들은 일시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인정받으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개연성을 쥐어줄 대상을 찾아야 했다. 그게 막연한 '대~한민국'이란 상징일뿐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호명한 대상과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은 별개의 존재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북풍'은 과거처럼 대중의 표심 작동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기 힘들게 됐다.

이는 2007년 대선에서 조건반사적 한나라당 지지층 30%를 뺀 부동층이 MB를 선택할 때 이미 고스란히 반영됐다. 대중은 국가의 안보를 지켜줄 대상으로서 MB를 선택하지 않았다. MB가 추구하는 팽창의 경제학이 대중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 전체 자본의 팽창을 부르고, 그 팽창에 따른 부수 이익이 대중 각자에게 돌아올 것이란 기대심리가 MB를 불렀을 뿐이다. 게다가 MB가 굳이 안보에 올인하지 않아도, 조갑제나 김동길이 "이 정권은 우리가 지지한 정권이 아니다"라고 분노해도, 조건반사적 한나라당 지지층 30%는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찍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겐 민주당의 대안 격인 '국민참여당'도, '민주노동당'도, '진보신당'도 없다. '자유선진당'은 지난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식물인간이 됐음을 보여줬다. 결국 죽으나 사나 한나라당뿐이다.

▲ 한겨레 6일자 31면
그러므로 MB의 계산기에는 조건반사적 지지층인 안보 우선주의자들은 달랠 이유가 필수적이지 않은 반면 팽창의 경제학을 통해 모두가 잘 사는 나라로 나가고 있다는 신화를 부동층에게 심어주는 일이 더 효율적이라는 산술이 나올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진보가 두려워해야 할 건 정작 천안함 정국이 몰고 올 '북풍'이 아니라 신중하면서도 효율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MB의 정상적 행보다. 진보의 역할은 그래서 그저 '보수의 안티'가 아니라 합리로 포장된 '팽창의 경제학'이 지닌 신화를 깰 수있는 대안찾기가 되어야 한다.

세대의 변화 역시 '북풍'이란 과거의 프레임을 거부하고 있다.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란 30~40대와 달리 10대와 20대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로 훈육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북한은 한 민족이기에 언젠가 통일 국가를 이뤄야할 대상이라는 존재감마저 거의 없다. 그래서 굳이 싸워야할 대상도 아니다. 학습 받은 전쟁에 대한 공포도 없다. 30대와 40대는 학습 받았던 반공교육이 얼마나 허구였는지 뼈저리게 깨달으며 과거의 훈육을 부정하는 성인기를 보낸 세대다. 50~60대는 안보 이슈가 생활의 전쟁터에 끼어들 틈이 없다.

IMF 이후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뒤 내 새끼 교육에 올인하고 있는 50~60대에게 중요한 건 국가 간의 전쟁으로 내 나라를 지킬 수 있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그저 권력과 재력이 없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군에 보내놓고 언제 다치거나 상실될지 몰라 맘졸여야 하는 내 새끼의 목숨과 안전일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30대 이후 60대까지에게 '북풍'이 의미있게 다가가려면 국가의 안위가 아니라 내 새끼의 목숨을 위협할 그 무언가가 작동해야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북풍'은 모순에 부딪힌다. 2002년 연평해전 때 보수 언론은 '진보 정권의 햇볕 정책이 북한의 도발을 불렀다'고 강조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만약 이번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타격에 의한 것이란 결과가 나온다면 '보수'라고 일컬어지는 이 정권도 진보 정권과 다를 바 없이 북한에 언제든 공격당할 수 있고, 그래서 언제든 내 새끼의 목숨을 앗아갈 수밖에 없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명제로 귀착되지 않은가. MB에겐 인지조차 거부하고픈 타격점이자 모순점이다.

'진화'한 MB와 회귀적 80년대 프레임

더 넓게 보면 MB가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자들과 안보 상업주의로 명맥을 이어온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보수주의자들의 간극에 대한 진보의 몰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 MB가 대변하는 대자본은 국가의 전복을 원치 않는다. 전쟁 혹은 통일은 어쩌면 그들에게 가장 피해야할 대상일지도 모른다. 국가의 불안 혹은 전복은 자본 유통의 자유로운 흐름이 끊길 수 있는 위기를 부른다. 게다가 전쟁 혹은 통일은 현재적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기득권 체제가 붕괴함을 의미한다.

반면 북한 연계설을 제기하며 대중에게 공포를 삽입하고, 이 공포를 활용해 체계적이고 획일적으로 통제 가능한 대중을 재생산하려는 안보 상업주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북한 연계설 혹은 전쟁으로 인해 호명 가능한 마초적 투쟁심은 호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보수 언론은 자본의 '진정한' 대변자라기 보단 그들 자신의 언론 권력 유지를 위해 과거 회귀를 고집하고 있는 구세대의 일단이다. 결국 안보 상업주의자들은 진화하지 않았거나 혹은 시작부터 짝퉁이었던 보수주의자인 반면 MB는 신자유주의적으로 진화한 자본주의자의 극단적 전형이 아닐까 싶다.

결국 천안함 침몰 사고는 한국 사회에 상당히 징후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북한과의 안보 문제를 둘러싸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작동이 어떻게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보수라는 과거 프레임을 깨고 나서고 있는지 상징적인 변화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가 과거의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에만 갇혀 있는 동안 MB는 자기도 모르는 새 무엇인가로 '진화'해 버렸다. 게다가 대중은 과거의 프레임을 토대로 한 강요된 가치를 거부하고 나선 상태다.

그 어떤 가치도, 국가도,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분절된 개인들이 대중을 엉성하게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과 관련한 사안의 민감성을 따지는 80년대 운동권의 가치도, 북한에 조건반사적으로 반감을 품고 있는 안보 상업주의자들의 가치도 별다른 의미를 품지 못한다. 과거의 프레임으로 MB를 이해할 수 없어 당혹해하는 진보가 MB를 뽑아준 대중마저 이해불가의 대상으로 방치한다면 더는 누구도 그 진보를 진보로 포장해주고 호명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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