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란 이름은 한국 사람이면 모두 아는 이름이다. 앞으로 50년 후에도 아마도 기억될 이름일 거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50년 전의 이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산MBC가 4.19혁명 5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누나의 3월'은 그 소중한 이름들을 우리들의 기억 속에 꼭꼭 눌러 다시 써주었다. 김주열, 김용실, 오성원, 노원자. 이 사람들은 세계가 알아야 할 이름은 아니지만 한국은, 한국에 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다.

그러나 고백한다. 김주열의 이름 말고는 생소하다. 머리에 든 것이 그리 많지도 않은데, 1960년에 딸린 이름에 마산에는 김주열 하나만을 기억하고 살았다. 50주년을 맞은 4.19혁명은 한국 현대사의 그 시작을 알린 중요한 일이지만 정권의 성격에 따라서 주목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다. 아직도 민주주의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정부수립 이후 단 한 번도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한 적 없는데 민주주의는 때때로 낯선 것이 되고는 한다.

MBC 특집드라마 '누나의 3월'은 매우 낮은 시점에서 3.15의거를 쫓아간다. 다방 레지 허양미, 구두닦이 오상원,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의 50년 전을 되밟았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지극히 고증에 의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낮은 곳에서 발로하지 않으면 또 혁명이라 할 수 없기도 하다. 그런 현상은 4.19혁명 20년 후에 일어난 광주항쟁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고등학생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기성세대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희망임은 분명하다. 4.19가 그렇듯이 미국산 쇠고기 정국에서 부끄러운 기성세대를 일깨운 것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우리사회는 민주주의에 관해서는 헌정사 내내 학생들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고 불려가고만 있다. 그 빚을 갚는 길의 시작은 그 이름만이라도 기억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불러본다. 김주열, 김용실, 오성원. 노원자. 권찬주.

'누나의 3월'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부정선거를 용인하지 못하겠다고 친구들과 함께 데모에 나서는 동생을 둔 다방레지 허양미가 겪었던 일들을 따라가고 있다. 부정선거에 항거해 시위를 하던 중 경찰의 발포로 구두닦이 오상원과 고등학생 김용실은 총상을 입고 사망한다. 그리고 양미의 동생 양철은 경찰서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며 빨갱이 연루조작에 엮인다. 동생을 빼오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평소 다방에 들락거리던 (해방 전 악질순사 아라이 겐뻬이로 독립투사들을 모질게 고문했던)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에게 농락당한다.

그러다가 김주열의 모친 권찬주를 통해서 박주임의 정체를 알게 되고 어느덧 양미도 당당히 시위대 선두에 서게 된다. 시위가담자들의 간첩연루조작의 혐의가 풀리면서 동생 양철은 풀려났지만 실종됐던 김주열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됨으로써 마침내 419를 점화하게 된다. 그러나 허양미는 또 다시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한 경찰에 의해서 하반신이 마비되는 부상을 얻게 된다. 그리고 요양원에서 한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다방레지에서 민주투사로 변모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마산의 상황, 아니 한국의 현실에 대해서 진술한다.

그 인터뷰이자 드라마 누나의 3월의 인트로에 해당하는 허양미의 짧지만 명료한 그 변신의 과정은 이렇다.

"나는 세상을 너무 몰랐어요. 진짜 몰랐어요. 머리에 소똥도 안 벗겨진 것들이 지들이 뭐를 안다고 날뛰나.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는 줄 아나. 너희 학생들이 꽥꽥 소리 지르고 암만 떠들어봐야 택도 없다 사람이 세상에 맞춰 살아야지 세상을 내게 맞춰 살라면 안 된다 그랬던 내가 315를 겪으면서 이승만 할배 한테 속고, 자유당한테 사기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지가 아무리 이승만 할배라도 오래 해처묵을라고 하고 국민한테 못된 짓을 하면 피칠갑을 하더라도 대들어야지 가만있다가는 국민은 가마떼기 취급밖에 못 받는다는 것을 4.19를 치르면서 깨달았습니다." 초반에 나오는 허양미의 이 내레이션이 드라마의 요약분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거의 모든 평범한 시민이 투사가 돼가는 과정의 전형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적 완성도로 본다면 누나의 3월은 다소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 사실 고증의 특성을 살리기에도 다큐멘터리적 기법을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익숙한 얼굴이라고는 박종표 역의 손현주, 민주당 지부장 정찬 그리고 권찬주 역의 오지혜 정도로 대부분의 출연자들이 낯선 얼굴들이라 서사적 접근을 도왔다. 그런데 50년 전의 까마득한 이야기가 왜 가슴을 뒤흔들고 눈물 쏟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 정도면 민주주의 아닌가? 할 수도 있는데 왜 아직도 민주주의라는 말에는 여전히 서러워지는지 모르겠다. 그 이름을 남몰래 쓰는 때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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