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합당론이 여의도 정치를 달구고 있다. 양당의 일부 구성원들이 공동교섭단체 등을 모색한다는 소식이 나온 이후 국민의당 측 ‘비밀여론조사’가 언론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18일 보도한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통합했을 때 시너지 효과가 가장 크다”는 내용의 이 여론조사에 대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민심을 가감 없이 보여준 것이란 취지의 평을 내놨다. 여론조사와 조선일보의 보도는 결국 안철수 대표가 원하는 방향을 말하기 위한 어떤 ‘장치’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비친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니 바른정당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바른정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조선일보 보도가 나온 18일 국민의당 김동철 원내대표를 만나 양당의 통합 논의에 힘을 싣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자강파와 통합파의 갈등이 확대되고 있는 바른정당 내에서 중립이지만 통합파에 가까운 입장이었던 걸로 알려졌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왼쪽)와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이 10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정책연구원-바른정책연구소 공동 주최 국민통합포럼 '선거제도 개편의 바람직한 방향' 토론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호영 원내대표의 입장 변화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 상황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입장 표명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신을 향한 재판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실상 ‘보이콧’ 방침을 밝히면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지도부가 추진하던 ‘친박청산’ 행보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홍준표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 출당과 서청원 최경환 의원 제명을 계속 밀어 붙이겠다는 방침이지만 친박계가 조직적으로 반발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전망은 안갯속이다.

바른정당 통합파 입장에서는 적어도 ‘거사’를 미룰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홍준표 지도부가 ‘친박청산’에 결국 성공하더라도 이 과정이 정치적으로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으면 통합 명분이 분명히 서지 않기 때문이다.

바른정당 통합파들은 ‘친박청산의 결과’를 보여줄 것을 통합의 전제로 요구하던 과거 입장을 끊임없이 후퇴시켜 최근에는 ‘친박청산의 의지’와 ‘당대당 통합’에 만족하며 빠른 복당을 추진하는 걸로 가닥을 잡아왔다. 그런데 ‘친박청산’의 과정에서 자유한국당 내의 친박계 세가 아직도 만만찮고 인식 또한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이 재확인되면 바른정당 통합파 입장에선 보수대통합의 명분을 말하는 게 쉽지 않아진다.

전당대회 출마를 예정하고 있는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이 19일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국민의당과의 통합을 ‘중도보수’로 포장하면서 바른정당 통합파들의 명분은 더욱 부실해지는 모양새다. 유승민 의원은 중도보수 통합을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국민의당에 햇볕정책 및 호남지역주의와의 결별을 통합의 전제로서 요구했다. 또, 유승민 의원은 자유한국당 내에 남아있는 중도적 성향의 일부 의원들까지 포괄하는 대통합이 이뤄질 가능성까지도 시사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국민의당 일부가 바른정당과의 통합에 동의하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실제 박지원, 정동영, 천정배 의원 등 당내 중진들은 바른정당과의 통합에 대해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며 부정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동교동계’와 의견을 같이 하는 정대철 국민의당 상임고문의 경우 19일 YTN라디오와의 전화 연결에서 아예 더불어민주당과의 통합 필요성을 노골적으로 재론했다.

이런 상황에도 국민의당 내에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는 예상보다 큰 것 같다. 조선일보 20일치 보도를 보면 국민의당이 소속 의원 40명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한 결과 30명이 찬성, 5명은 유보, 5명은 반대 입장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국민의당 소속 의원 다수가 바른정당과의 통합에 찬성하는 이유는 정확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추측하기로는 크게 세 가지 판단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첫째는 당의 대주주인 안철수 대표가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강력하게 원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바른정당은 어쨌든 분당을 눈앞에 둔 상황이고 통합파들이 자유한국당에 복당하고 나면 남는 의원 수는 소수에 불과할 것이므로, 양당의 통합은 국민의당의 정체성 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종의 ‘흡수통합’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바른정당의 정치적 기반이 영남이라는 점에서 통합이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인물들의 선거기간 동안 생사여탈에 큰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는 점이다. 나쁠 게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바람직한 정치는 이런 1차원적 산수와 공학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안철수 대표와 유승민 의원은 둘 다 유력 차기대권주자로 인식돼있다. 그렇다면 정계개편은 반드시 다음 대선까지 이르는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대선은 다자구도로 시작돼도 마지막엔 1대1 구도가 될 확률이 높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보수정치를 자처할 이유가 없으므로 야권의 유력후보는 보수정치 일반을 대변하는 인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다. 안철수 대표 등은 3당 구도의 유지를 위해 통합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그 귀결은 보수정치 세력의 ‘옷 갈아입기’가 될 확률이 크다는 거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1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안철수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제가 MB아바타입니까”라고 말해 화제에 올랐다.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은 안철수 대표의 정계진출에 대해 “올 것이 왔다”고 말한 걸로 알려져 있다. 지금이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악의 화신’처럼 회자되고 있지만,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당시의 이명박 전 대통령은 많은 국민들의 눈에 ‘중도-실용’ 후보로 비춰져 본선에서 자기들 말로 “600만 표 차이”로 승리를 거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승리를 뒷받침한 것은 1990년 3당 합당 때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고 했던 한나라당 내의 이른바 민주계였다.

안철수 대표가 ‘3당 구도’에 집착하는 것은 ‘양쪽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란 이미지를 선점해 정치혐오 정서를 자극하고 선거공학이란 차원에서 이득을 추구하려는 심산일 것이다. 그러나 안철수 대표가 가려는 바로 그 길이 보수정치의 구세주가 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례를 통해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똑같이 ‘중도’를 지향하더라도 최소한 바른정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극단주의와의 절연을 시도하고 보수를 혁신하겠다며 정치적 손해를 감수한 집단이다. 반면 안철수 대표와 국민의당은 사실상 자신들에게 정치적 해를 안겼다는 표현에 불과한 ‘친문패권주의’ 말고 어떤 극단과 어떻게 싸웠다는 것인지 제대로 설명을 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양지바른 길로만 가려다 스스로의 꾀에 넘어가는 일만 반복하고 있다. 호남정치의 역사성과 햇볕정책을 포기하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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