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정권 초에 하지 않으면 못한다고들 했다. 대통령의 권력이 가장 강할 때에도 제대로 된 개혁은 어렵다는 현실 인식이 담긴 말이다. 여기서 ‘개혁’이란 새 정부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과거 정부의 잘못된 점을 고치는 일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대 정권에서 개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됐다.

먼저 초기에는 주로 정책적 측면에서 이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정권이 통치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면 고유의 아젠다를 밀어 붙이게 되고 이 과정에서 여러 잡음과 실수가 나온다. 이 때문에 통치 동력이 떨어진다 싶으면 이전 정권의 도덕성을 문제 삼을 수 있는 허물을 하나씩 들춰내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전임 정권과의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고 ‘정치보복’이니 하는 얘기가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렇게 되면 ‘힘겨루기’는 결국 어느 정도의 ‘타협’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문재인 정권은 이 과정을 단 5개월 만에 전직 대통령들의 사법조치를 눈앞에 둘 만큼 압축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애초에 전임 대통령이 국정농단으로 탄핵을 당한 상황에서 출발한 정권이니 만큼 현재의 정국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개혁의 속도는 성과를 기대하게 한다. 전임 정권과의 ‘타협’이 아니라 그야말로 적폐청산, 이 사회 곳곳에 깊게 뿌리 내린 부조리와 비리를 일소하는데 한 점의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예상했던 대로 대통령 취임 5개월 만에 치러지는 국정감사는 누가 여당이고 야당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모양새로 이뤄지고 있다. 여당 소속 의원들이 전임정권에서 벌어진 일들을 적극적으로 들춰내고 보수야당이 이를 방어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과거 차은택 씨 등과 유착관계를 형성했던 KT가 주도한 인터넷은행 K뱅크 관련 문제가 새로운 의혹으로 제기되는가 하면 10년 전 대선판을 뜨겁게 달궜던 BBK 의혹까지 재론되는 판국이다.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진 자유한국당 소속의 어느 의원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야당”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런 찰나의 착각 속에 오히려 진실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공세에 직면한데다 내년 지방선거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보수야당은 전열 정비를 서두르고 있다. ‘전임 정권’의 일원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정당들의 통합 모색이 무엇보다도 시급한데 상황이 도와주질 않는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통합과 이를 기반으로 한 지방선거 대비 전략은 박근혜 전 대통령 문제를 정리하는 게 전제가 될 때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 연장 후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1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보수정치의 대의 같은 것에 손을 들어줄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는 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재판에서 처음으로 적극적인 입장 개진을 감행했다. 사건 관계자와 기업인들에 대한 선처를 요구하는 대목도 있으나 이런 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에나 박수를 받을 수 있는 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주장의 핵심은 재판에 정당성이 없고 오히려 정치보복의 맥락에서 사법절차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재판 보이콧을 선언한 것인데, 법조계 전문가들은 앞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 재판이 더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지도부는 이 직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자진탈당을 요구하는 절차에 돌입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출당조치를 밟겠다는 계획이다. 어차피 추석 연휴 이후 예정돼있던 절차이므로 새로울 것은 없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나온 직후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출당을 ‘어쩔 수 없는 일’ 정도로 받아들이던 구 친박계 인사들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과거 친박계의 행동대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자유한국당 김태흠 최고위원은 18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양당통합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적 보유 여부가 연계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주장을 내놓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탈당을 하더라도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것이어야지 정치적 상황의 압력을 통해 되는 것엔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출당 조치에 응할 것으로 생각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홍준표 지도부로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의사가 작용하지 않는 형태로 ‘제명’을 결정해야 하는 운명을 눈앞에 두게 된다. 홍준표 대표는 오는 23일 미국으로 출국을 한다는 계획인데, 18일로 예정됐던 윤리위 소집 역시 불투명한 상황이라 홍준표 대표의 출국 전까지 결론이 날 가능성은 낮아지고 있다.

친박계 일각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1심 선고 전까지 결정을 미뤄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는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입장 표명으로 국정농단 사건 관련 재판의 선고는 기약이 없어진 상태다. 이런 반발을 무릅쓰고 홍준표 대표가 결단을 할 수도 있겠으나 원래 부실한 당내 기반 탓에 쉽지 않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북핵폐기 전술핵 재배치 천만인 서명운동 본부 국민서명패 전달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이런 상황에도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분위기인 바른정당 통합파의 복귀는 여전히 초읽기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 문제가 정리되지 않으면 어느 정도의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인지 장담하기 어렵다. 다수 여론조사에서 확인되는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지지율을 산술적으로 합치면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1대 1 구도를 만들더라도 이 정도 지지율 차이가 있는 상태에서 지방선거를 치르면 패배라는 평가를 면하기 어렵다.

보수야당의 지리멸렬은 문재인 정권의 ‘적폐청산’에 더 강한 힘을 실어줄 것이다. 최근 소셜미디어 등 온라인 공간에서 “그런데 다스는 누구 겁니까”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는 현실은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공수처를 머리 위에 이게 될 팔자인 검찰도 성역 없는 수사를 최대한 신속히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모처럼 수사권 조정의 호기를 맞이하게 된 경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살수차의 직사살수에 희생된 백남기 씨 사건에 연일 다양한 방법으로 사과를 감수하는 모습을 보라.

아직 이런 말은 이르지만, 과거 정권의 정치적 과오를 바로잡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면 이제 미래에 대해 말해야 한다. 정치평론가들은 여소야대와 협치를 말하지만 헬조선의 정치 풍토에서 그런 구상은 작동하기 어렵다. 개헌을 통해 제도를 바꾸는 게 유일한 길이지만 정치권의 합의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 문재인 정권으로서는 다수 국민의 여론을 최대한 등에 업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제대로 된 개혁의 방향을 잃지 않고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 시민들도 함께 권력을 감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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