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당 숙종’이란 말을 낳은 열혈임금은 음변사건을 덮은 것이 마음에 걸려 밤늦도록 업무에 몰두하고 있는 서용기를 찾았다. 그러나 숙종은 말이 허당일 뿐 현대의 대통령에게서도 찾기 어려운 대단히 민주적인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용기를 내시들조차 밖에 떼놓고 홀로 찾은 까닭은 음변사건을 함께 쫓은 의미 때문이다. 군주는 무치라고 해서 왕은 어떤 경우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음변사건을 덮은 것을 서용기에게 직접 양해를 구한 것은 완곡한 사과의 뜻까지 담고 있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은 동이에게 무릎을 꿇고 등에 올라서게 한 것 이상의 큰 의미를 담는다. 뒷골목 패거리들의 헛된 의리가 아니라 군신유의의 그 의리이다. 그런 엄숙한 자리에서 더 이상 위험한 잠행을 삼가라는 서용기의 진언에 숙종은 또 그 허당스러운 너털웃음을 지어보이며 "재미가 있어져서 말일세"하며 저자의 장삼이사가 된 경험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충동에 대해서는 동화 '왕자와 거지'를 통해서 이미 익숙한 동기이다.

그런데 그 말을 마치고 돌아가는 숙종에게 강아지가 낑낑 거리는 듯 애달아 있는 동이가 발견된다. 장옥정에게 몰래 전달해야 할 약재 때문에 통행금지 시간을 넘긴 동이가 담을 넘으려 하다가 숙종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미 재미 들렸다고 고백한 숙종이 그냥 지나칠 리도 없다. 주위를 물리친 숙종의 도움으로 동이는 무사히 궐내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딱딱한 조정말투가 아닌 저자 말투로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 동이와 몇 마디를 섞는다.

거기서 임금의 하사품을 자랑하는 동이 말에 맞장구치면서 신나서 자화자찬하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역시나 숙종의 이번 케릭터는 적어도 동이와 함께 하는 동안은 허당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동이를 보내고 내관들이 다가와 왜 천한 아이한테까지 신경을 쓰냐고 묻자 대답 또한 걸작이다. "그러게 말이다. 오늘은 내가 엎드려 줄 수가 없어서 말이다"한다. 궁궐이 아니었다면 또 엎드려 줄 기세다. 그런데 그렇게 저자 말투에 재미 들린 숙종보다 시청자는 그런 허당 숙종에게 더 심각하게 중독된 듯하다.

그렇게 허물없이 친해지고 또 장옥정과 얽히면서 동이가 결국 승은을 입게 되겠지만, 그런 굵직한 전개보다도 잔잔하게 동이와 주고받는 허술한 왕의 모습이 당장은 더 솔깃하고 또 기다려지게 됐다. 그것은 숙종이 동이에게서 경험한 그것과 매우 비슷한 현상이다. 이것은 남녀 주인공이 빨리 잘 되길 바라는 조바심과는 다른 기다림이다. 숙종은 시청자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떤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은근히 자극하기도 한다. 지금은 떠났지만 우리 사는 현실 가까이에 숙종과 비슷한 한 인물이 있기도 했었다.

숙종의 그런 면 때문에 동이에 출연하는 많은 코믹 케릭터들이 상대적으로 빛을 발하지 못한다. 거꾸로 그런 허다한 코믹스러움 속에서도 오롯이 빛나는 숙종의 허허실실한 모습이 더욱 특별해지기도 한다. 웃음의 여러 요소 중에서 으뜸은 의외성인데 숙종이 주는 즐거움에는 그 의외성과 더불어 못마땅한 현실 속의 대리만족을 얻게 되어 참 뒷맛 개운한 웃음이다.

동이는 지금까지의 이병훈 표 사극과 사뭇 다르다. 대장금과 비교하는 이들도 적지 않으나 전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제작진뿐만 아니라 시청자 역시 피장파장이다. 그러나 유난히 도드라지는 변화는 왕실을 배경으로 한 어떤 사극에서도 볼 수 없었던 숙종의 파격이다. 한효주의 보살미소에 혹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숙종의 사람 좋은 소탈한 웃음이 은근히 중독되게 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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