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7시간의 미스터리’가 사실은 ‘세월호 7시간 반의 미스터리’라는 걸 알았을 때, 쉽게 말을 잇기 어려웠다.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많은 국민들의 머릿속에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왜 이런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는지, 희생자들이 온전히 구조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결과적으로 왜 이 모든 문제가 용인되고 말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을 우리 사회는 아직 끝내지 못하였다.

이런 의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것은 참사 당일 지도자의 행적이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그 날 최선의 대응을 했더라면 희생자들을 얼마나 더 구조해낼 수 있었는지를 셈해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리 사회는 나름대로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12일 청와대가 공개한 사실은 지금까지 우리의 노력이 헛된 것에 불과했다는 자조를 할 수밖에 없게 한다.

당시 사고가 대통령에게 보고된 시간이 오전 9시 30분이라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전원 구조’ 지시를 내릴 때까지 걸린 시간이 15분이 아니라 45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45분에는 세월호가 복원 불가능한 상태로 기울어져 간 시간이 포함된다. 만일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이 보고가 올라오고 15분 후, 그러니까 오전 10시 15분이 아닌 9시 45분에 구조당국에 과감한 작전을 지시하였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임종석 비서실장이 12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월호 참사 당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던 2014년에 이런 모든 사실이 투명하게 공개되었다면 박근혜 정권은 예측할 수 없는 규모의 정치적 손해를 감수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고통의 끝에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해결책의 모색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나라는 영원하다. 그래서 지도자는 결정적 순간에 정권이 아니라 나라를 택할 수 있는 공적의식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시에 택한 것은 나라가 아니라 정권이었다는 게 이 사례를 통해 드러났다. 진상을 규명하고 참사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보다 세월호 특조위의 요구와 야당의 비판을 피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최대한 가리고 책잡힐만한 일들을 없애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런 사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불순세력’이라는 핑계까지 동원됐던 게 아닌가 한다. 다소 비윤리적이며 절차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은 일을 감수하더라도 정권 수호를 위해 불순세력의 공세는 회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불순세력에 의해 선동을 당한 사람들’을 거쳐 ‘불순세력 그 자체’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당하고야 말았다.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사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거액의 보상이며 일부는 정치적 미래를 위해 장기간의 단식까지 불사하고 있다는 식의 여론몰이가 대표적이다.

이런 맥락을 본다면 철학적 차원에서 공문서를 멋대로 수정하는 국정농단과 불순세력을 고사시키자는 블랙리스트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새롭게 떠오른 블랙리스트계의 다크호스(?)는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그는 주일대사와 국정원장을 연이어 맡았다가 이른바 문건 유출 사건으로 사퇴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후임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이 시기 이병기 전 비서실장은 수석비서관회의 등을 통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불순한 단체로 지목하고 여론몰이를 지시하는가 하면 역사교과서 국정화 필요성을 강변하는 대국민 홍보 수단으로 KBS를 이용하라고 지시하는 등 비상식적 방법을 동원한 국정 운영에 골몰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김기춘 뺨칠 정도였다”고 평가한다. 이런 사실은 정권이 바뀐 이후 청와대 내에서 발견된 이른바 ‘캐비닛 문건’들에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두드러진 이념적 편향성을 보여준 이병기 전 비서실장도 문고리 3인방 등을 제어하지 못해 말기에는 ‘왕따설’에 휘말릴 정도였으니 박근혜 정권의 국정운영이 얼마나 불법적이고 편의적인 방식으로 일관되었는지 느끼고도 남음이다. 이러한 비상식은 보수정권 9년간 거의 모든 국가기관에 걸쳐 일어난 모양인데, 임의의 방식으로 수정된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이 각 부처에 통보가 됐음에도 별 탈이 없었던 걸 보면 그런 믿음이 강해진다.

문재인 정권의 청와대는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 문제의 경우 김관진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설명을 내놓았다. 김관진 전 실장은 최근 ‘기-승-전-김관진’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의혹에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이중 가장 문제가 심각해 보이는 것은 사이버사령부의 불법적 활동들과 관련한 것이다.

사이버사령부는 2009년 북한의 디도스 공격 이후 필요성이 제기돼 2010년 설립됐고 이후 2011년 9월 국방부 직속 사령부로 재편됐다. 사이버사령부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국면인 2011년 10월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동은 군의 비밀 통신망을 통해 청와대에 직보됐다. 이런 활동에 예산과 인력이 낭비되는 동안 군 전산망은 북한에 해킹을 당하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등의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김관진 전 실장은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10년 12월부터 국방부 장관을 맡았는데, 최근 검찰 조사를 받은 전직 사이버사령관들은 김관진 전 실장이 국방부 장관이던 시절 국내정치 개입 등을 지시 독려하였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고 한다. 결국 사이버사령부의 불법적 활동의 처음과 끝에 이명박 정권부터 박근혜 정권까지 봉직한 김관진 전 실장이 있는 셈이다.

김관진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연합뉴스)

이토록 타깃이 명확해 보이니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 자유한국당은 충격적 사실들이 연이어 밝혀지고 또 재론되는 와중에도 이 모든 것이 문재인 정권의 정치보복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보고서를 무단으로 조작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 연장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국정감사를 정쟁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수’가 아니냐는 식이다.

보수세력을 통틀어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성의있는 해명으로 등장한 것은 13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등장하는 전 정권 청와대 핵심관계자의 주장이다. 보고서는 9시 30분에 작성했지만 보고 자체는 10시에 했다는 식이다. 만약 그랬다면 보고서 파일 자체를 많은 시일이 흐르고 난 뒤에 굳이 10시 버전으로 수정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국정감사는 입법부가 행정부를 감사하는 과정이지만 이런 상황 때문에 이번에는 모양이 전혀 다르다. 제1야당은 말해봐야 손해만 볼 뿐이니 소극적으로 하는 게 좋다는 분위기고 여당은 공세 수위를 최대한으로 높이고 있는데 거의 박근혜 정권 말기 국정감사라고 불러도 될 정도이다. 이전까지 정권은 12월에 탄생했기에 10월의 국정감사는 1년차의 평가가 될 수 있었으나 문재인 정권은 5월에 탄생하였으므로 평가 대상이 될 만한 것이 크게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국정감사의 기본 구도는 문재인 정권 대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국정감사 기간 동안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통합파는 정치보복의 피해자를 자처하며 보수대통합을 모색할 것이고 국민의당 일부도 연정을 고리로 해서 문재인 정권과의 새로운 관계형성에 나서려 할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인식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다. 이 중요한 시기에 반성하고 전폭적으로 협력할 테니 적폐청산을 원하는 만큼 해보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퇴행적 논의와 주장만 반복하는 보수정치에 미래는 없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세월호 참사의 최대 의문점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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