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 심야 음악프로에서 크라잉넛이 출연했다. 데뷔 15주년을 기념하는 스페셜 무대였다. 그들이 15년차 밴드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언제나 풋풋하고(?) 엉뚱한 청춘 같은 그들이 이미 30대 중반의 중견 밴드라는 건 한편 그들보다 약간 연배가 위인 스스로의 나이를 재확인시켜주는 것 같아 쓸쓸하기조차 했다. 그래도 뭐, 간만에 그들의 공연을 TV 화면을 통해서라도 보니 반갑고 좋았다.

사적으로 크라잉넛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 대한 느낌은 언제나 말 안 듣는 동생들 같다. 그것은 처음으로 접했던 그들의 공연 때 각인된 어떤 ‘인상’ 때문일 것이다. 더프는 군에서 막 제대한 직후인 1997년 초에 그들의 공연을 처음 보았다. 그들이 클럽 ‘드럭’에서 무대에 서기 시작한 것이 1995년 무렵이고 옐로우키친과 함께 만든 옴니버스 앨범 <Our Nation Vol.1>을 발표하고 세간에 이름을 조금씩 알리기 시작한 것이 1996년이다. 그러니 더프가 크라잉넛을 첨 봤을 때 그들은 완전한 무명은 아닌 그야말로 ‘올모스트 페이머스’한 밴드였다.

▲ 크라잉넛 홈페이지

여하간 그 무대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크라잉넛의 단독 공연은 아니었고 당시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던 락 카테고리의 다양한 밴드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진행했던 합동공연이었다. 공연이 벌어진 곳은 대구의 몇 안 되는 라이브 클럽 <모리슨>이었다. 평소에는 미군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했고 당시 그 바닥 클럽 문화를 잘 아는 지인의 표현을 빌자면 '약쟁이‘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는 그곳에는 한 구석에 포켓볼 당구대가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밴드 관계자로 보이는 이들이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무대 앞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그 당구대에서 병맥주를 마시며 포켓볼을 즐기는 중딩 날라리들이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그 중딩 날라리(?)들이 무대에 올라왔다. 바로 크라잉넛이었다.

전형적인 (너바나 이전)80년대 메탈키드였던 더프에게 그들의 무대는 한 마디로 당황스러웠다. 펑크라는 음악의 특성을 배제하고 보자면 연주기술은 단순했고 음악도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건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진정 신나서 하는 연주였다. 선배들 앞에서 머리 박아가며 테크닉 배우던 메탈 세대들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엉성하고 거칠지만 에너지가 있었다. 이른바 홍대 인디문화라는 새로운 흐름의 솟아오름을 눈으로 본 셈이다. 아니 단지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몸으로 느꼈다. 386세대를 확실하게 건너뛰고 88만원 세대 이전에 존재했던 그들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 새로운 문화의 흐름 외각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은 별로 없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렇게 뜨겁게 90년대의 밤을 ‘말달렸던’ 청년들이 어떤 아저씨, 아줌마들이 되어가고 있을까 이다. 넓게 보면 더프까지도 포함되는 이 세대는 대략 91년대 강경대 투쟁과 함께 저물어버린 가두 정치투쟁 시대를 뒤로 한 채 스무살이 되었고 과거의 군사정권에 비하면 한결 유화적이었던 문민정부의 온기를 듬뿍 받으며 비교적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청춘을 구가했다. 고(故) 최진실 씨가 출연했던 <질투> 같은 드라마는 비교적 ‘따땃했던’ 그 시절의 인증샷이라 할 만 하다. LG트윈스 전성기의 ‘신바람 야구’도 이 세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그 무엇이었다. 경제개발의 혜택을 한 몸에 받았던 소비세대이며 정치적 무거움에서 벗어난 탈정치의 세대라 불렸던 그들 말이다. 크라잉넛 같은 친구들은 사실 이 세대에서도 별종에 속했다. 한 측면에는 오렌지족이라 명명되었던 소비지향의 젊은이들이 있었고 반대의 측면에는 여전히 사회적 소외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존재했다.(지존파니 막가파니 했던 살의의 탈주를 감행했던 이들은 그 간극의 극단을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따땃했던 이 세대에게 위협이 다가온 것은 주지하다시피 1997년말, 외환위기가 닥친 순간부터다. 처음에는 돌파해 나가면 해결될 것이라고 선전되었던 이 위기는 이후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전반적 구조를 재규정하고 먹고 사는 모든 이들의 발목을 휘여잡는 유무형의 굴레가 되버렸다. 입학하니 강경대 투쟁이 있었고 졸업하니 외환위기로 인한 취업난에 시달렸다는 91학번들의 푸념이 무색하게, 새로운 밀레니엄으로 넘어온 이후 취업시장은 점점 비좁아졌고 노동유연화라 불리는 착취의 질곡은 깊어지고 있기만 하다.

얼마 전,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던 친구 한명이 동료 4명과 함께 일방적인 해고 통지를 받았다. 회사에서 내세운 이유는 경비절감을 위한 인원감축이었으나 회사에서는 그 자리에 비정규직 직원을 채용한다고 한다. 친구도 사실 연초에 비정규직으로는 전환을 제안 받았었다. 힘 없으면 대책 없이 죽으라는 얘기다. 그리고 얼마 전에 삼성반도체 생산직에서 근무하던 20대 초반의 여성노동자는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벌써 공식적으로 7명, 비공식적으로 9명 째라고 한다. 회사에서는 작업환경과 상관없으니 산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전문가가 아닌 만큼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가지만 집고 넘어가자. 백혈병이 무슨 감기처럼 쉽게 걸리는 병인가. 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줄지어 죽어나가는데도 주요 신문이고 방송이고 다들 잠잠하다. 힘 없으면 죽어도 대책이 없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게 2010년의 대한민국이다.

총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건, 기성세대가 젊은이를 착취하는 것이건 간에 분명한 것은 돈 없고 빽 없는 청춘의 비극에 맞서 닥치고 깃발을 다시 세울 때가 되었다. 크라잉넛이 15년 전에 노래했듯, ‘모든 것은 막혀있고 우리에겐 힘이 없으나’, 더 이상 ‘바보 놈이 될수 없는’, ‘거짓에 싸워야’ 할 시기가 무르익은 것이다. 대체 언제까지 우리가 치사하게 눈치보며 연명할 것인가의 문제가 걸린 것이다. 어떤 정치 집단이나 이념을 위한 싸움이 아닌,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의 생존과 자존을 위한 싸움이 절실해졌다. 볼혹을 앞둔 어설픈 아저씨가 15년차 중견 밴드의 공연을 보다가 불끈해진 야심한 새벽의 상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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