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쓰러 PC방에 오면서, 누구에게 편지를 쓸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종업원이 한글 프로그램 까는 동안에 정했어요. 명예훼손 고소를 당해 황당해 하는 원 선배에 관해 편지 보내기로요. 지난 목요일 오후 약간은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했잖아요. “전 박사, KBS로부터 나 고소당했어!” 만약 누군가 내게 당신의 멘토는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자랑스럽게 말해요. 서강대 원용진 교수라고요. 좀 닭살인가요? 허허. 좋아요. 그럼 말을 바꿀게요. 가끔 맘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라고 하죠, 뭐.

문화연대 들어가기 전에 내가 선배를 얼마나 씹었던가요? 술만 취하면 온갖 욕설을 내뱉고 생 지랄을 하다시피 했었죠? 되도 않은 운동 때려치우라고,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운동이나 하는 단체하고 진보정치가 무슨 상관있냐면서. 그래도 요즘은 선배가 내게 욕 더 잘 하잖아요. ‘전규찬, 야 임마!’ 이제 됐죠? 암튼 우린 누구나 인정하는 절친이잖아요. 학계에서는 동성애 관계라 놀리는 사이죠. 하하~ 아무튼 그런 선배를 누가 괴롭혀요? 일간지의 선배 칼럼에서 쓴 소리 좀 했다고요?

선배가 쓴 글, 문제가 된 <한국일보> 칼럼을 꼼꼼하게 읽어봤어요. 3월 4일자 ‘우리나라의 역사도 외면한 공영방송의 부끄러운 현실’이었죠, 제목이? 문제가 될 소지가 있나 없나 냉정하게 따져봤어요. 허 참, 나름대로 빈틈을 잘 읽어 낼 수 있다고 자부하는 데, 그 글에서는 통 문제를 집지 못하겠더라고요. “공영방송 사장”을 향한 약간의 훈계와 약간의 조롱이 섞여 있었다고 명예훼손이 성립되는 건가요? 어떤 사실의 악의적 왜곡이 있었지요? 대체 뭐가 문제가 되는지, 언제 고소장 한번 보여주세요.

그런데도 KBS로부터 엄청난 액수의 고소를 당했다고요? 내 원 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나네요. 어휴, 정말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지. 걱정 마세요. 별일 없을 겁니다. 그 정도로 문제가 된다면, 이 땅에 비평가들은 모두 펜을 꺾어야, 아니 자판을 치워야 할 겁니다. 공영방송이 비평 바깥의 성역이 아닐 바에야, 오히려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더욱 더 비평의 곤란을 감수해야 하는 거라면, 연구자이자 운동가이면서 비평가인 우리는 더욱 비평의 칼날을 오뚝 갈아야 합니다. 기죽지 마세요. 말 그대로 필승일 거니까요.

정말 모두들 고생이 많아요. 문석이, 양 박사 일도 그렇잖아요. 원 선배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미디어행동 내 우리가 자리 난 방통위원으로 나가라고 밀었었죠. 또 누구에게 그 자릴 맡겨요? 결국 지난 5일에 민주당 추천 몫으로 양 박사가 내정되었잖아요. 사실 방통위원 자리는 정당의 것이 아니잖아요? 공영방송을 위한 시민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미디어 공공성에 관한 대중들의 의견을 대의하는 사람이 맡아야 할 자리 아닌가요? 지난번 큰 실수한 민주당에서 이번에는 시민사회의 여론을 청취하여 양 박사로 그렇게 내정한 거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죠? 내정한지 벌써 2주나 지났지 않나요? <아이뉴스>의 어떤 기자는 내정 다음 날 ‘‘양문석 방통위원’에게 바란다‘는 제목의 글을 쓰기도 했죠? <오마이뉴스>도 문석이를 최시중 위원장을 향한 ‘견제구’로 일찌감치 정리했고, 대충 그렇게 보는 게 틀린 것은 아닐 터인 데,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요? 왜 일이 더 이상 진척되지 않는 건가요? 민주당 내부에서 또 무슨 브레이크가 걸린 건가요? 통 움직이지 않네요. 모두 설설 눈치만 보네요. 엉뚱한 소리만 삑삑 흘러나오네요.

뒤늦게 자격시비가 있는 모양인 데, 참 웃기는 이야기 아니에요? 테스크포스팀을 만들어 심사·면접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확인하지 못했다는 건지, 아니면 문제없다고 넘어간 것을 뒤늦게 다시 문제로 삼고 나선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게 진짜 문제인지 믿기에는 의심이 들고 불편한 대목이 한두 가지 아닙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을래요. 할 말이 정말 억수로 많지만, 아직 일이 진행 중이니 참아보도록 할게요. 어차피 나중에 모든 걸 다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명예훼손 당해 마음이 찝찝할 원선배 만큼이나 황당해 하고 있을 양 박사에게 뭐라고 선배로서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런 저런 일 겪으면서 문석이가 얼마나 힘들어 하겠어요. 물론 만나보면 여전히 거친 언행과 촌스러운 웃음기 등 바뀐 게 별로 없는 듯하지만, 속으로야 얼마나 힘들어 하겠어요. 주변 선배와 후배들에게 쉽게 드러내지 못하지만, 혼자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내 같으면 이 정도에서 벌써 뚜껑 열려 폭발해 버렸을 거예요. 성질 급한 그 놈은 그래도 평상심을 잃지 않아 참 용해요.

몇 년 전부터 그 녀석만 보면 늘 마음이 싸 하고 그래요. 둘이서 소주 한잔하고 집에 가면서 약속했거든요. 서로 몸 잘 챙기자고. 그래서 오래 함께 운동을 지켜나가자고. 그런데 작년에 먼저 문석이가 쓰러졌잖아요. 제 예상이 맞아 떨어진 거죠. 겨우 추슬러 병원에서 퇴원하자 나보고 그러더라고요. ‘죽지 않으려면 형도 작작 마셔!’ 그래도 어떻게 해요. 이 시대, 이 현실, 이 현장 속에서 다시 몸을 망가뜨리며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어 버렸는데요.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해주지 않잖아요?

솔직히 문석이가 가끔 내게 들이대는 것을 보면 진짜 가관이에요. ‘전규찬, 전규찬!’ 마치 내가 지 후배나 되는 것처럼 함부로 취급해요. 첨보는 사람들이 보면 깜짝 놀랄걸요. 저렇게 함부로 구는 놈도 희한하지만, 그걸 참고 넘어가는 사람도 이상하다고 할 거에요. 그런데 과연 그들은 알고 있을까요? 그 녀석이 그렇게 해 댈 수 있는 선배가 나뿐이라면? 만약 내가 그런 그를 받아주지 않으면 녀석은 어떻게 울분과 원통은 해소해? 나도 가끔은 누구에겐가 그렇게 생 지랄을 하고 싶은데. 옛날처럼 생욕을 퍼붓고 싶은데.

제가 원 선배한테 한 것에 비해보면, 문석이는 사실 훨씬 덜한 편이에요. 아주 가끔씩만 내게 그러거든요. 솔직히 기분이 살짝 나쁘긴 하지만, 묘하게 측은한 느낌도 든답니다. 며칠이 지나면 뭐랄까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먹먹해지기까지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억지투정을 받아주는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사랑과 신뢰는 가끔의 무례함을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리잖아요. 허허, 원선배도 나의 무례와 폭력을 그런 심경에서 받아주고 넘기셨나요? 고마워요. 늘 그렇게 감사해 하고 있어요.

원 선배하고 통화하고 나서 문석이에게 전화했습니다. 방통위원 건과 관련해, 순리를 따르자고 했습니다. 늘 그랬듯이, 원칙대로 밀고 나가자고 했습니다. 민주당 내부에 문제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걸림돌이 명확하게 무엇인지를 살펴본 후, 무리하지 않게 상식에 따라 풀어나가자고 했습니다.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이 민주당에 넘어간 이상, 양 박사는 평소 활동가 위치로 돌아갑니다. 원 선배도 명예훼손 건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평시의 활동을 펼쳐 나가면 됩니다.

양 박사 생각도 나고 원 선배 생각도 많고 해서 이런 글을 써봅니다. 두 사람 다 지금은 저 보다 더 힘들잖아요. 파이팅! 원 선배한테 또 편지 보냈다고, 자기한테는 한 번도 이런 것 쓴 적 없다고 문석이가 투덜댈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자기한테 쓰면서 원 선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모두에게 다음 주가 아주 중요하네요. 저도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더 잘 챙겨볼게요. 워낙 부족한 후배라, 늘 이렇게 말로만 그치지만. 미안해요. 진달래 만개한 봄날 밤을 이렇게 피시방에서 다 보내기 아쉬워, 이제 그만 둘래요. 총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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