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낫의 ‘파랑새’와 씨엔블루의 ‘외톨이야’ 사이의 표절 논쟁이 한창 지난 지금, 다시, 표절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당시 격한 논쟁이 오고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이제 사태는 법정으로 옮겨졌다. 1년 이상이 소요되는 긴 싸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대중적 관심이 사그라든 시점에, 정보공유연대의 주최로 4월 8일 표절을 주제로 한 조그만 세미나(이달의 토크: 창작과 표절 그 미묘한 지점)가 진행됐다. 한물 지나간 주제로 뒷북이나 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리는 치열했던 논쟁을 차분히 되짚어 보며, 표절문제에서 핵심적이지만 정작 논쟁 속에서는 누락됐던 어떤 것들을 드러내고 이야기 하는 자리였다.

▲ 밴드 '씨엔블루'

지난달 와이낫은 ‘외톨이야’의 작곡가를 상대로 저작권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하는 소송을 걸었다. 소송을 제기하며 와이낫의 리더 주몽은 소송이 최선의 수단은 아니었지만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말한바 있다. 이달의 토크에서 그는 표절을 방치하는, 혹은 어떤 측면에서는 구조적으로 그것을 조장하는 음악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제제기의 방식에서 소송이 최선의 수단이 아니었다고 말할 때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표절과 저작권 침해가 완전히 일치 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음악계의 구조적 병폐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음악계에 여러 측면에서 경종을 울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표절을 막기 위한 해결책에 대한 논의에서는 쉽게 저작권 침해 방지 정책으로 귀결되곤 했다. 과연 저작권 침해 방지가 표절을 막는 최선의 길이고, 유일한 길일까? 사실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저작권이 저작권자의 권리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개정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번 지적되어 왔다. 거기에는 이용자의 향유권은 거의 고려되어 있지 않다. 저작권의 유용성을 옹호하는 이들이 저작권법 1조를 거론하며 그것이 문화의 향상 발전(지난번 개정에서 문화와 관련 ‘산업’의 향상 발전으로 문구가 수정되었다)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여도, 그 세부 내용에서는 그 목적을 부정할만한 수 많은 악소조항으로 가득차 있다. 대중음악계의 유명작곡가들의 표절 관행에 문제제기를 하기 위한 소송이 저작권 강화로 환원된다면, 역설적으로 그 결과는 유명작곡가들(만)의 이익을 더 확실히 보장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표절을 저작권 침해로 동일시 한다거나, 표절 방지를 저작권 강화로 환원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사실 표절과 저작권 침해는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보호기간이 만료된 저작물이나 공공영역(public domain)에 있는 표현물, 그리고 공정이용에 해당하는 경우 저작권 침해는 인정되지 않는다. 반면 표절에는 그런 예외가 전혀 없다. 표절에는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의 표현물이 타인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절은 단지 타인의 창작물을 흉내내거나 도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타인의 창작물이 처음부터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때문에 표절에서는 타인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또한 저작물이 저작권자의 동의하에 이용된다거나 이용 후에 문제가 발생할 때 저작권자의 용인이 있다면 그것의 이용이 법적으로 정당화 되는 반면, 표절에는 원 창작자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표절은 타인의 창작물에 있는 오리지널리티 자체를 부정하는 한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때문에 표절자는 원 창작물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창작자는 창작물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말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는 침묵해야 하며,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말할 (저항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창작은 원래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창작은 모방과 참조의 계기가 새겨져 있다. 모방과 참조를 통한 훈련과 그것들의 축적이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조금 모방하면 창작이 되고, 많이 모방하면 표절이 되는 것처럼, 즉 창조와 표절의 경계는 모호한 것이기 때문에, 창작자를 함부로 표절자로 매도해서는 안되고, 설사 그가 표절자로 판명이 난다고 해도 그를 쉽게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외톨이야’의 작곡가중 한명인 김도훈은 이러한 논리에 근거해서 자신이 표절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주장 중 하나는 와이낫의 ‘파랑새’가 박상민이나 컨츄리꼬꼬의 노래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외톨이야’가 표절이면 ‘파랑새’도 표절이며, ‘파랑새’가 표절이 아니라면 ‘외톨이야’도 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모방이나 유사한 음악적 요소들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차용되거나 이용되었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표절은 단순한 모방이나 저작물 침해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표절에는 타인에 대한 부정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권력이 각인되어 있다. 표절 문제에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또 하나! 표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작권법이 가진 문제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저작권법은 여전히 문화의 향상 발전이나 이용자의 향유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반하는 것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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