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중고책방을 둘러보다 김훈을 집어 들었다. 이순신의 검명(一揮掃蕩 血染山河, 크게 한번 휩쓰니 피로써 산과 강을 물들인다)에서 드러난 삼엄한 단순성에 굴욕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멸적 정서가 깔려 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칼의 노래>는 <남한산성>과 더불어 서로 다른 두 가지 굴욕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훈 장편소설 <칼의 노래> <남한산성> 표지

선조의 질시와 당쟁의 유탄을 맞아 고초를 당할 때, 통제사로 거둔 군사적 성취가 한낱 정치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망가진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백의 신세로 전장을 향해야 했을 때, 이순신이 겪었을 내적 동요를 직접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난중일기>는 백성과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을 감추지 않지만 자신의 굴욕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김훈은 이순신의 탈정치성을 말하지만 무반응도 하나의 정치다.

그의 내면은 누구보다 뜨거웠을 것이다. 굴욕에 거세게 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인으로서 전란에서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따름이다. 이순신은 결국 전후 펼쳐질 권력투쟁으로 또다시 굴욕을 당하는 대신 노량에서 목숨을 던지는 것으로 가장 격렬하게 굴욕에 응답했다.

인조는 자신의 무능이 빚은 참사 앞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어쩌면 명·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폈던 광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앞선 결정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능히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보다 자신의 처지를 먼저 한탄할 인간이다.

그러나 삼전도의 굴욕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군왕이 된다. 군왕으로서 더 이상 백성들이 도륙당하고 강산이 파괴되지 않게 행동한 것이다. 김훈은 최명길의 입을 빌어 인조가 이제 ‘백성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썼다.

이번 추석 연휴에 식구들과 영화 <남한산성>을 보러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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