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러하지 못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지요. 어찌 그러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 파업 중인, 투쟁하는 KBS의 방송노동자들은 물론이고, 현 사태를 비상하게 지켜보고 있을 다수의 시민·시청자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KBS를, 한국 공영방송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우려는 쉽지 않은 쟁투에 나섰는데, 어찌 안녕할 수 있겠습니까? 안녕하지 못합니다. 나는, 우리는 모두 그러하지 못합니다.

촛불은 한국사회 중요한 변혁기의 다른 말에 불과합니다. 암흑을 뚫어내는 희망의 표현입니다. 10년 동안 철저하게 망가진, 국가권력 선전장치로 전락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도구로 타락한 KBS를 촛불의 이름으로 재 민주화하는 사업이라는 말입니다. 당신들이 만들어낸 우익 파시즘, 극우 전체주의 자본국가에 의해 완벽하게 붕괴한 공영방송을 폐허로부터 재건하는 프로그램의 시작점. 그 결정적 순간의 우리가 어찌 안녕할 수 있겠습니까?

알아듣겠습니까? 파업이 있어, 정규 방송 프로그램을 보지 못하니, 그러하니 답답하고 힘들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땅한 파업이니 감수를 해야 할 것이고, 방송 제대로 못 보는 것은 무슨 대수입니까? 오랫동안 나는 KBS 뉴스 보지도 않았습니다. KBS에서 제대로 된 토론이나 다큐멘터리를 볼 수나 있었습니까? 그러지 않으려는 파업, 제대로 된 방송을 하려는 파업이니 기꺼이 성원하며 감수해야 하겠지요.

내가, 우리가 안녕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그런데도 고 사장 당신을 포함한 문제의 인물들이 공영방송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킨 책임을 지고 나가지 않으니, 그러하니 안녕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신과 김장겸 등이 내부로부터 구축한 반역의 저항선을 넘어, 새로운 방송 독립, 또 다른 공영방송 민주화를 만들어내라는 역사의 사역을 짊어지려니, 그 역할이 너무나 막중해 고민이자 고역이라는 뜻입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KBS·MBC 공동파업과 언론노조 총력 투쟁 승리를 위한 결의대회에서 언론 노동자들이 공영방송 정상화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도 명예로운 촛불혁명의 명령이라면 따라야지요. 당신은 모르지요? 제발 더 이상 안녕하지 말라는 촛불입니다. ‘안녕’이라, (개를 폄하할 뜻은 아닙니다만) 개나 주라지요. 나는 안녕을 접습니다. 대신 불안을 택합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이명박-박근혜 통제체제에 비겁하게 굴종하면서, 진실대의에 반역해 결국 ‘기레기’라는 혐오대상으로 전락하며, 저널리즘 영역이 처절하게 파괴되는데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지금까지 우리의 ‘안녕’으로 충분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안녕했습니다. 당신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KBS와 공영방송은 무력해지는데, 우리는 너무 안녕했습니다. 한국사회는 극우의 지옥세계로 들어섰는데, 민중은 전체주의 감옥에 갇히고 해고된 동료들과 검열당한 시민들은 불행한 삶을 겨우 버티는데, 그런데 우리만 태평한 죄가 너무나 큽니다. 그 비겁을 토로하고 죄과를 반성하면서 이제 겨우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양심으로 나선 우리에게 무슨 안녕입니까?

고 사장, 이 글 쓰는 듣보잡 서생을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죠? 나는 당신을 뚜렷이 잘 기억합니다. 박근혜가 당선된 바로 그 투표 때의 대통령선거방송특별심의위원회인가 하는 긴 이름의 회의체에서 나는 꽤나 가까이에서 당신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인상적이었던 건, 이미 구설에 오른 당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덧붙여, 그 위중한 자리에서 당신은 일체 발언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더라는 점입니다.

꽤나 전투적인 나랑 붙을 일이 없었죠. 일부러 피한 건가요? 아니면, 원래 그리 매너가 좋거나 과묵한 건가요? 꽤 촉이 좋은 나는 그때 상황을 정확히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고대영 저 사람은 KBS 사장이 된다. 저 사람은 그 기회를 침묵의 기회주의로 챙기려고 할 뿐이다. 나는 그렇게 언론연대 활동가들을 비롯해 운동장의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거죠.

마침내 당신이 KBS 사장 자리를 꿰찼습니다. 당신을 신임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당신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습니다. 행동에 나섭니다. KBS에서 ‘좌빨’을 내몰아내고 공영방송의 저널리스트들을 ‘적출’하고 공영방송의 저널리즘을 제압하는 MB씨들의 작전이 이어집니다. KBS는 당신들 뜻대로, 아니 당신들 상부 각하의 명령대로 더욱 ‘건전화’되어 갔죠. 말뿐인 현실의 ‘공영방송’은 계속해 민주주의 이상의 공영방송을 배신해 국영화되어 갑니다.

시나리오 그대로입니다. 예상했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옥상태의 연장. 절망사태의 연속. 당신들이 원했던 바가, 우리가 예측했던 것이 그대로 실현되어 갑니다. 당신들의 승리, 민주주의의 패망. 극우기득권의 득세, 사회진보의 후퇴. 사회의 위기화, 생활의 위험화. 세월호와 그때 보여준 KBS 당신들의 말도 안 되는 짓거리는 그 반민주주의 비상상태를 표출한 최악의 사례에 불과합니다. 아, 지금 떠올려도 오싹한 풍경입니다.

야수의 시간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지난 10년 내내 한 시도 안녕하지 못했습니다. 오직했으면, ‘안녕하십니까?’ 하는 대자보가 대학가에서 유행했겠습니까. 반어. 아이러니. 안녕하지 말자, 안녕하면 안 된다, 그렇게 우리는 분노와 환멸, 절망의 시절을 통감하면서 서로를 위안하며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어둠을 뚫고 왔습니다. 그때 당신들은 무엇을 하며 살았습니까? 우리의 불안에 쾌재를 부르며 거꾸로 너무나 안녕하셨지 않나요?

KBS 고대영 사장이 1일 오후 서울 63빌딩에서 열린 방송의 날 축하연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노조원들의 퇴진 요구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고 사장, 돌아봅니다. 오만한 집권 체제에 부역하면서, 질의하는 의원들에게 맞서 국회에서조차 ‘가만히 있으라, 말하지 말라’ 부하들에게 다그치던 당신의 행적이 고스란히 떠오릅니다. 침묵의 처신술을 버린 당신은 그때 참 기세 좋은 사장으로서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기고만장’이 딱 어울립니다. 멋진 시간, 좋은 시절이었죠? 황홀하고 행복하셨죠? 당신들은 오랫동안 안녕했습니다. 앞으로 영원히 이대로 안녕하고 싶었을 겁니다.

아뿔싸, 어떻게 하죠? 민중들이 눈치 채버렸습니다. 더 이상은 이런 국가의 꼬락서니로 안 된다는 판단이 집단적으로 생겨났습니다. 중요하게, 행동에 나섭니다. 저들의 안녕은 우리의 불행일 뿐이다! 우리의 안녕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저들의 지배를 더 이상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를 이제는 접자! 그래서 촛불이 빛나고, 각하가 자리에서 쫓겨나며, 파시즘의 적폐 청산이 시작되어, 다행히 사회 재민주화의 희망이 겨우 재생하고 있습니다. 지금입니다.

이 역사적 시점에 우리가 어찌 안녕할 수 있습니까. 안녕하면 안 됩니다. 절망 대신에 희망을 위해서,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해서. 이 시점, 고 사장 당신에게 역사의 질문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안녕하고 싶으신가요? 우익 기득권, 극우 정치권의 안녕을 끝까지 챙기려는 건가요? 당신과 우리 그리고 공영방송 모두가 안녕할 유일한 안녕의 조건이 뭔지 아직도 모릅니까?

계속 지금처럼 모른 척 하실 겁니까? 김시곤 전 국장까지 나서 고 사장 당신이 “한국방송을 말아먹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종북, 좌빨인가요? 보수의 말을 들으세요. 그는 역사의 판단에서 살아남았잖아요. 모든 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정확하게 기록에 남는, 무서운 역사의 심판입니다. 나는 “파업 원인 제공한 적 없다”고 버티는 것은, 한마디로 가소롭습니다. 그런 변명은 더 이상 안 통합니다.

도청사건 당시 “진실이 드러나면 핵탄두급”이라 발언한 보도본부장으로서 고 사장 당신은 이미 충분한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두렵죠? 진실에 항복하세요. ‘공영방송 정상화’ 뭐 이런 거룩한 명분이 어색하고 불편하다면, 그냥 현 KBS 조직의 심각한 분란과 기능 중지, 경영 마비 상태에 관해 사장으로서 책임지면 됩니다. 무능을 토로하고 자리를 내놓는 게 도리죠. 그러면 고 사장, 혹 당신도 조금은 지금보다 안녕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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