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초여름은 광우병 쇠고기를 반대하는 촛불로 뜨거웠다. 10대부터 노년층까지 시민들은 광화문에 꾸역꾸역 모였다. 21년 만에 100만명이 군집했다. 그러자 곳곳에서 분석과 해석이 난무했다. '저들의 군집화를 이끈 동력이 과연 무엇일까'가 관건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달리 이번 촛불은 군사정권과 같은 명확한 투쟁의 대상이 없지 않느냐'가 고민의 시작점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분석의 틀을 금세 찾아내 공격 대상을 정하고 탄착점을 포착했다. '분명 저들을 이끈 배후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다. 대통령은 "저 양초들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하는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집회를 '주도'했을 것이라고 판단한 '좌파' 시민단체를 색출했고, 이들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촛불을 켠 증거'들을 수집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하지만 대통령과 경찰의 사고는 1980년대보다 더 이전의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시민들은 정부의 그런 시대착오적 무지에 콧방귀를 꼈다.
'이해할 수 없는' 군집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정부는 언론보다 감각이 떨어졌다. 자본에 의해 작동하는 언론은 기민하게 전략을 짤 줄 알았다. 핵심은 대상의 분절화였다. 언론은 즉각 '시민'들과 '선동 단체'들을 구별지었다. 학생 운동권과 노동자 단체가 '시민참여 분위기 속에 나서기가 부담스러워 조용히 개별 참석했다'고 적었고, "정치집회 비판 여론을 잠재우자"는 논리에 따라 '주최(?)'측이 깃발 동원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상적인 소재인 쇠고기 문제에 남성들의 참여가 적어 여성들이 촛불을 주도한다고도 했다. 시민들은 역시 콧방귀를 끼려했지만 뭔가 찜찜했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을 구분지으려는 언론의 시각엔 동의할 수 없었지만 노동자 단체의 깃발에 선동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일상에서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10대는 '공장에서 일하며 몸으로 노동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 공부하라는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으며 산다. 20대 역시 같은 이유로 스펙 쌓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30대에게 노조는 '일하지 않으면서 무리하게 몫만 요구하는 이들'로 자리매김한지 오래고, 40대 이상에게 노동자라는 단어는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타자화한 대상이었다. 그렇게 노동자는 그 자리에서 '시민'으로 인정받길 거부당했다. 집단지성으로 일군 촛불은 저항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 것이 분명하지만, 그 안에서 '군집의 섬'처럼 배타적으로 내동댕이처진 대상이 있었던 것 또한 분명했다. 자본은 그렇게 일상으로 스며들어 주입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군집을 분절하고 대상을 구분짓는 전략을 구사할 줄 알았다.
쌍용차 옥쇄파업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당신과 나의 전쟁>은 그런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영화는 제목으로 이미 할 이야기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당신'과 '나'는 집단화할 가능성이 있는 대상을 해체하기 위해 자본이 이데올로기를 작동해 분절시킨 너와 나다. 이때 '당신'과 '나'는 영화가 도입부에 묘사하는 것처럼 매일 출근하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과 정리해고 대상이 된 노동자들일 수 있다. 지난해 5~6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눈물을 흘리던 추모 군중과 같은 시기 쌍용차 투쟁 현장에서 섬처럼 유리된 노동자와 그 가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뿐이 아니다. 자본의 분절화 전략은 타자화한 노동자들 안에서도 대상을 다시 잘근잘근 나눈다. 정리해고 대상이 되어 살기위해 옥쇄파업에 뛰어든 사람, 산자이면서 신동기씨처럼 옥쇄파업에 동참한 사람, 산자로서 '목숨 같은 일자리'를 지키고 싶어 해고 대상자를 애써 외면하고 관제데모에 참여해 어제의 동료에게 쇠파이프를 들어야했던 사람, 하루 벌이를 위해 인력사무소에서 끌려와 아버지뻘 되는 이들에게 새총을 쏘아야했던 사람. 이들은 모두 자신이 무엇을 향해 싸워야 하는지 모른 채 그저 한 명의 시민이 아니라 배제당한 노동자로, 또 그 노동자 중에서도 산자와 해고당한 자, 그리고 관제데모에 동원된 자와 남의 일에 폭력을 써 밥벌이하는 자로 각각 분리돼 군집할 수 없는 개체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서 정작 투쟁해야할 대상인 자본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공동체를 형성해야할 그들은 서로 이유도 모른 채 싸우며 하나하나 개체화하고 만다.
영화는 옥쇄파업이 끝난 뒤 여전히 복직을 위해 손 팻말을 든 해고 노동자들을 외면한 채 묵묵히 전자 출입문에 출퇴근 카드를 찍고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자들을 묘사하며 끝을 맺는다. 전자 출입문은 말한다. 옥쇄파업 이전까지 공동체로 살아 숨 쉬던 공간은 이젠 당신과 나를 구분짓는 배타적인 공간이 되었음을, 그 공간 안에 속한 구성원들의 삶은 철저한 기계적 노동의 매트릭스로 구분지어졌음을 말이다.
추신.
<당신과 나의 전쟁>은 배급사를 통해서 개봉될 수밖에 없는 현재의 극장 시스템에선 상영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방법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 상영을 신청하거나, 4월에만 28번 예정돼 있는 공동체 상영 공간에 찾아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될 듯하다. 상영일정 등은 <당신과 나의 전쟁> 공식 블로그 http://77days.tistory.com/ 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동체 상영 등 수익금은 전액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전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