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등은 미일 정상으로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될 수 있다고 썼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총회 기조 연설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 비하자면 단연 ‘정상’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북한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는 결국 평화적 해법을 도출하기 위한 것이고, 북한 역시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화에 이제는 나서야 한다는 연설의 내용은 매우 상식적이다.

유엔 총회 기조연설 중 ‘비상식’의 한계를 보여준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연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완전히 파괴(totally destroy)할 수 있다고 했다. 보통 독재자나 독재정권을 비난하며 해당 국가 주민들을 피해자로 묘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인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발언은 전략핵무기 등을 발사해 북한 전역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뉴욕 유엔총회장에서 제72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여전히 미국이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이나 예방전쟁 수행을 감행할 것인가에 대해선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가능성이 낮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니키 헤일리 주유엔미국대사나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 등이 트럼프 대통령의 극단적 발언 이후 군사적 옵션은 최후의 수단이고 아직 외교적 해법의 여지가 남아 있다며 ‘톤다운’에 나선 걸 봐도 그렇다.

다만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지난 18일 ‘서울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북한 공격 옵션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있다. 하지만 자세한 말은 하지 않겠다”고 답한 것은 신경 쓰이는 부분인데, 송영무 국방부 장관 등은 이게 무엇에 대한 발언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중앙일보는 22일 지면에서 제임스 매티스 장관이 언급한 ‘해법’을 고주파탄 등을 동원한 북한의 전쟁 수행 능력 무력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정확한 실체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아무튼 미국이 주도하는 이러한 일련의 극단적 상황은 결과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압박하게 된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총회 기조연설 직후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한과 거래하는 모든 제3국의 기업과 개인을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대북 독자제재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힌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결국 미국이 갖고 있는 대북옵션의 전체적인 방점은 여전히 ‘중국책임론’에 찍혀 있지 않느냐는 해석을 해볼만하다.

세컨더리 보이콧은 특히 중국에 큰 압박이 될 수 있는 해법으로 이전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중국은 북한 대외교역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일 정상회담 모두발언을 통해 “중국의 중앙은행이 자국 다른 은행들에 북한과 거래를 즉각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면서 “시진핑 주석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이 발언으로 미루어 보면 중국이 일단은 미국의 압력에 손을 들어주기로 한 셈이다.

세컨더리 보이콧은 이란의 돈줄을 막아 핵협상에 나오게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를 보면 북핵 위기에 있어서도 이란의 사례와 같은 방식으로 세컨더리 보이콧이 작동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북한의 관영언론 조선중앙통신은 22일 북한의 김정은이 국무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성명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이 성명에는 “모든 것을 걸고 미국 통수권자의 망발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받아낼 것”, “트럼프가 우리의 어떤 정도의 반발까지 예상하고 그런 괴이한 말을 내뱉었을 것인가를 심고하고 있다”, “트럼프가 그 무엇을 생각했든 간에 그 이상의 결과를 보게 될 것”, “우리도 그에 상응한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조치 단행을 심중히 고려할 것”이라는 극단적 표현들이 포함돼있다.

결국 미국과 중국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하던대로 하겠다는 것이니 이제 남은 것은 또 다른 군사적 도발뿐이다. 지금 예상해볼 수 있는 것은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고각이 아닌 실전용 각도로 발사하는 것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시험을 강행하는 것이다. 북한의 선택이 둘 중 무엇이 되든 미국 본토를 직접 위협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추가 대응 조치를 불가피하게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뉴욕 롯데 팰리스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극단적 대치국면에선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사실상 없다. 일본 언론 보도에 의하면 트럼프 미 대통령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만찬에서 “북한을 봉쇄하는 데 힘이 필요하다. 당신에게는 힘이 있다”면서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 정부에 대해선 “힘이 없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유엔 총회 직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을 통해 “북한과 더 이상의 대화는 막다른 길”이라고 했고 유엔 총회 연설에서도 같은 취지의 발언을 반복하며 “미국의 대북 태도를 일관되게 지지한다”고 했다.

이런 일본의 움직임은 한국 정부를 따돌리고 미일 공조를 강화해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 이후 역내에서 미국의 대리인을 확실히 자처하겠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런 행보를 국내의 지지층에게도 어필함으로써 아베 신조 총리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해보겠다는 계산도 깔려있을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에 대한 강경책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의 압력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충격 완화를 위해 움직이는 모습이 이어지면 우리 정부는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고전적 냉전 구도 속에 종속되고 만다.

현재로선 이 길을 피할 도리가 없어 보이는데, 그렇더라도 군사적 갈등 국면이 영원히 이어지리라고 볼 수는 없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한중일 순방 일정이 예정돼있는 11월 말에 구체적인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 대북 정책의 한 축은 중국에 대한 압박인데, 이는 안보정책을 통해 무역 불균형을 바로잡고 동시에 무역 불균형을 명분으로 안보정책을 강제하는 것으로 표면화되고 있다. 결국 어떤 종류의 ‘일괄타결’이 필요할 수 있는데, 이 시기의 중국은 19차 당대회 등 내부 권력 투쟁에 이은 안정화 국면에 진입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다른 때보다 합의의 가능성은 더 커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어떤 ‘반환점’을 돈 이후 동아시아 정세는 각자의 군비확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6자회담을 근간으로 하는 비핵화 협상 테이블이 마련될 것인지 양자택일의 순간을 맡게 될 것이다. 이때 보다 바람직한 경우의 수가 선택지 위에 올라와있기 위해서는 북핵 문제에 관여하는 주요 국가 중 누군가는 ‘대화’를 언급하는 상태여야 한다.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총회 기조 연설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울러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레이건 독트린’을 통한 미소 간의 핵군축 협상의 배경으로 작용한 것 중 하나는 유럽 내에서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핵군축운동의 위력이었다는 사실이다. 유엔 총회 기조연설 직후 이뤄진 한미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한국의 최첨단 군사자산의 획득과 개발을 통한 한미연합방위태세 유지와 강화에 원론적으로 합의했다고 한다. 일부 언론은 이 결과로 핵추진잠수함 도입이 현실화될 것인지를 점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적어도 대중운동의 어느 부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평화군축의 원칙을 분명히 하는 흐름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대중적 흐름이 실체화 되어야 결과적으로는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대북 대화론에도 실질적 힘이 실린다. 1980년대를 관통한 냉전 시기 미소 핵군축 협상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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