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고백기도에는 ‘네 탓’이 없다. 오직 ‘내 탓’일 뿐이다. 고백기도문은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메아 꿀빠 메아 꿀빠 메아 막시마 꿀빠) 즉,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로 되어 있다.

100분이 약간 넘게 전개되는 고백성사를 스크린을 통해 봤다.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2>다. 경계인을 ‘똘레랑스’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가 송두율 교수에게 한 편을 완전히 버리고 한 편에 완전히 설 것을 강요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 '경계도시2' 스틸컷

예수회의 박홍 신부는 사울이 바오로가 되는 비유를 들어가며 전향 이상의 고백을 요구한다. 결국 송두율 교수는 고백을 한다. 가톨릭의 신부 앞에서 하는 고해소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을 향한 기자 회견장에서 공개적으로 말이다.

고백성사는 자신의 죄를 고해하는 것이긴 하나, 신에게 보속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은총의 기쁨으로 가득차야 한다. 하지만 스크린에 비친 송두율 교수의 얼굴에선 보속의 은총이 읽혀지지 않았다. 강요당한 고백의 고통이 그의 얼굴에서 그대로 일그러졌다.

이 영화는 송두율 교수의 고백성사가 아니다. 고백성사를 강요하는 우리 안의 레드 콤플렉스가 만들어 낸, 우리의 고백성사다. 그것도 ‘내 탓’ 아닌 ‘네 탓’임을 소리치는 통성기도다. 그 ‘네 탓’은 성령이 사라진 온갖 방언으로 혼탁하기만 하다.

2003년 당시 방언으로 통성을 했던 이들 가운데엔 필자도 포함된다. 북한 노동당 서열 23위 김철수와 송두율 교수가 동일 인물이라는 보도를 보면서, 그가 고백성사를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믿었던 2003년이었다.

2003년의 모습을 담은 <경계도시2>는 스크린 안에서 ‘우리 안의 레드 콤플렉스’가 보여준 ‘네 탓’의 고백성사였지만, 스크린 밖의 관객석은 6년이 지난 시점에서 ‘내 탓’임을 토로하는 고해소가 된다. 결국 <경계도시2>는 삼중의 고백성사가 드러나는 영화다.

하나는 전향을 강요당하는 송두율 교수의 고백성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스크린 속에서 훈수란 이름으로 보여준 등장인물들의 집단적 고백성사, 그리고 끝으로 관객 스스로 하게 되는 고백성사.

송두율 교수의 고백성사가 끝난 지, 6년이 지난 시점에서 여전히 ‘네 탓’임을 고백하는 방언 기도는 고해소의 문을 박차고 행군중이다. 한나라당의 안상수 의원의 발언이 그렇고, 방문진의 이사장이었던 김우룡의 발언 파문이 그렇다. 냉전이 끝난 지, 20년 가까이 됐지만 아직도 ‘우리 안의 왜곡된 레드콤플렉스’는 너무도 견고하다. 조갑제닷컴에선 봉은사의 ‘명진’이 왜 ‘친북 좌빨’인지를 낱낱이 까발리겠다며 성업중이다.

우리의 몸은 시간적으로 21세기 현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 안의 레드 콤플렉스는 냉전의 시대에 머물고 있다. 1950년 한국 전쟁 속에서 가둬진 채 스스로 폭압을 자행하는 광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최인훈의 <광장>에 등장하는 이명준은 지금도 인도로 가는 배에 오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백성사를 해야 한다. 고해소는 <경계도시2>가 상영되는 영화관이다. ‘네 탓’ 아닌 ‘내 탓’임을 고백하는 통한의 고해소에서 우리는 남과 북이란 분단상황이 만들어 낸 왜곡된 레드콤플렉스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것은 고백성사에 대한 우리 시대의 보속이다.

'내 탓'으로 스스로를 용서하고 타자를 포옹하고 경계인을 관용할 수 있는 찬송을 우리는 <경계도시2>에서 불러야 한다. "Kyrie Eleison (기리에 엘레이손)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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