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예측한 죽음도 이 정도면 행복합니다. 죽음이 단순한 한 인생의 종결이 아닌 남겨진 자들을 위해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살았었던 세상에 대해 남겨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치일 테니 말입니다. 그들은 죽었기에 더욱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대길이 태양을 향해 활을 쏘듯이 말입니다.

죽음도 그들에게는 희망이다

1. 업복이의 죽음이 남긴 희망

24회 동안 많은 죽음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죽음들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한 제작진들의 노고가 모두 담긴 마지막 회였습니다. 어설픈 희망가가 아닌 죽음으로 들려주는 희망은 강한 울림으로 전달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피디가 밝혔듯 서로 다른 엔딩을 통해 새로움과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랑과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의미 있게 전달해주었습니다.

'업복이와 초복이-대길이와 송태하, 언년이-짝귀와 최장군과 왕손이-설화' 등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사이에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죽음과 삶 모두 희망에 대한 갈구가 존재했기 때문이지요. 피디가 각기 다른 엔딩을 준비했듯 어떤 엔딩이 자신의 것인지에 대한 호불호보다 의미 있었던 건 모두 하나의 가치를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추노>를 보면서 가장 애정을 가졌던 업복이의 죽음은 그 허구의 극대화가 주는 강렬함이 최고였습니다. 양반 놈들의 농간에 홀려 자신들의 꿈을 저당 잡히고 몰살을 당해야만 했던 천민들. 그렇게 죽어가는 상황에서 끝봉이가 업복이에게 건넨 마지막 한 마디는 가슴을 울립니다. "무섭다. 저 놈들 정말 무서워"라는 이야기는 여전히 무서운 그놈들이 있기 때문이겠죠.

초복이와 함께 재미있게 살라는 끝봉이의 마지막 당부와 달리 이미 서로에게 희망을 이야기한 업복이는 세상에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리는 최후를 준비합니다. 총을 들고 궁궐 안으로 들어서는 업복이는 자신들의 이상을 짓밟고 희망을 담보 삼아 죽음으로 내몬 주범들에게 복수를 합니다.

노비들에게 희망이었던 그 분의 배신과 그 분을 만들어낸 좌의정까지 업복이는 자신들의 희망을 다시 이야기할 수 있도록 결자해지를 해줍니다. 그의 마지막 장면이 누군가의 시각으로 보면 대중을 선도하는 포퓰리즘과 같다고 이야기되겠지만, 이는 자신의 죽음으로 민초의 삶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위대한 죽음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살아서 할 수 없는 일을 죽어서 할 수 있음을 우린 2009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기에 더욱 가슴이 저려오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해 남겨진 수많은 노비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를 가슴 속, 아니 뼈 속 깊이 새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평소 업복이의 노비답지 않음을 탐탁하게 보지 않았던 나이든 노비의 '자각'은 불끈 쥔 두 주먹에 희망이 담기고, 이 희망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촛불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로 유행처럼 되어버린 '자각'의 위대함이 무엇인지 업복이는 죽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조선비와 좌상의 죽음을 목도한 살인귀 황철웅에게 인간으로서의 '자각'이 시작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업복이의 최후는 <추노>가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가치였습니다.

2. 사랑의 가치를 극대화한 그들이 아름답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이야기를 다룬 <추노>는 마지막까지 그 집요한 흐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대미를 장식할 수밖에 없는 건 대길과 송태하, 언년이일 수밖에는 없지요. 그리고 그들을 쫓는 황철웅의 마지막 대결에서 누가 죽고 살아남느냐의 문제는, 어느 순간 경계를 넘어서고 무한한 희망만 남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길은 죽음으로 희망을 이야기하고, 살아남은 송태하와 언년이는 민초들에 묻혀 희망을 설파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남겨진 철웅은 업복이로 시작된 '자각'이 대길의 죽음으로 완성되며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자신의 부인을 껴 앉으며 오열합니다. 그의 눈물 속에는 자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존재였던 병든 아내에 대한 사랑과 후회, 그리고 죽어간 이들에게 배운 '희망'이 섞여 있었습니다.

신분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송태하도 혜원이든, 언년이든 상관없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위대한 죽음들을 통해 얻은 '자각'의 힘일 것입니다. 청나라 행을 버리고 민초들 속에서 희망을 꿈꾸는 송태하와 언년이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대길을 품에 앉고 눈물의 가락을 부르는 설화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안타깝지만 그렇게 자신의 품에서 자신이 만든 옷을 덮고 죽어간 대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살아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설화이지만 그에게는 덧없는 사랑을 영원한 사랑으로 새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질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던 <추노>는 마지막에 '사랑'에 대한 정의를 명확하게 해주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함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그들의 모습은 진정 사랑했기에 아름다웠습니다.

3. 떠오르는 해는 우리의 것

은실이와 함께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초복이가 건넨 해가 누구 것이냐는 질문과 답변 속에 <추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모든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은실아. 해가 누구 것인지 알아?"
"누구 건데요?"
"우리 것"
"왜요?"
"왜냐면 우린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으니까"


저항의 상징이었던 총을 들고 희망을 이어갈 은실이와 함께 해로 상징되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초복이의 모습은 <추노>에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님을 분명하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마지막 그들의 대사를 들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도 가지지 못한 해에 대한 갈구 때문이겠지요. 죽은 대길이가 떠오른 해를 사냥하는 모습은 죽어간 이가 남겨둔 절절한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세상에 메여있는 모두가 노비"라는 대길의 이야기와 "세상이 만만하면 내가 숨어 살겠냐"는 짝귀의 씁쓸한 한마디는 모두 우리의 모습이라 더욱 뭉클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오포교가 업복이의 죄를 짊어지고 문초를 당하지만 서민들의 피를 빨던 오포교를 대신한 육포교는 한 술 더 떠 서민들을 힘들게 합니다. 그렇듯 변하지 않고 더욱 정교해지는 권력자들의 수탈은 지금도 여전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가'를 놓을 수 없는 건 절망하면서 살기에 우리의 삶이 너무 짧기 때문이겠지요.

마지막 대길이가 태양을 향해 희망을 쏘듯 그 희망이 담긴 태양을 가질 수 있는 것도 희망을 갈구하는 우리(초복이와 은실이로 상징되는)의 몫일 것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따라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추노>는 마지막에 강렬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업복이의 통쾌함과 초복이의 당당함, 대길이의 희망가는 <추노>를 기억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들이겠죠.

어설픈 자만심이 만든 '죽음'이 아닌 희망을 이야기하는 <추노>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 이상의 의미를 담아냈습니다. 난무하는 죽음들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곽정환 피디는 그의 전작인 <한성별곡-정>과 같은 메시지를 이야기하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치지 말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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