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핵 재배치 문제가 계속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미국 정부 내에서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것을 전제로 남한 내 전술핵 재배치를 배제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미국 언론 보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해당 사실을 보도한 NBC는 전술핵 재배치는 지난 30년간 유지돼온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깨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NBC의 보도 내용은 일단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제재안 표결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1차적 압박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을 제재 대상에 올리고 원유 공급의 전면적 차단 등을 골자로 하는 대북제재안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는 반대 입장을 거두지 않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내 전술핵 재배치 여론을 전한 NBC 보도

만장일치가 전제돼야 하는 유엔 안보리 내의 역학구도에서 이런 경우엔 새로운 합의를 모색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미국은 11일 표결을 밀어 붙이고 있다. 대북제재안이 표결처리 되지 않으면 미국은 사실상 중국을 타깃으로 한 ‘세컨더리 보이콧’을 발동시킬 것이다. 또, 남한 내 전술핵 재배치는 결과적으로 ‘핵 도미노’로 연결돼 대만의 핵무장 여론까지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가 반발할 수밖에 없는 카드를 엄중한 상황에서 꺼낸 건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남한 여론에 따라서는 전술핵 재배치 문제가 이렇게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이와 연관해서 다시 떠올리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미국 대선에서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달 30일에는 지난 25년간의 대북정책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의 메시지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즉, 트럼프 행정부 내의 고립주의적 흐름에는 분명히 남한 내의 전술핵 재배치를 용인할 수 있다는 의견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남한 내 전술핵 재배치로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첫째로 남한 내 전술핵 재배치는 앞서 언급한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깨고 북한의 핵무기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미국이 주도해온 핵 비확산 흐름을 역행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둘째로 남한 내 전술핵 재배치는 이를 관리하고 유지해야 할 인력과 예산을 필요로 하게 되므로, 필연적으로 미군의 군사적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킨다. 미국은 현재에도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북한에 대한 핵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굳이 추가적 부담을 감당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따라서 남한 내 전술핵 재배치가 가능해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로는 남한 정부가 이를 어떤 형식으로든 요구하고 이와 관련한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다. 청와대는 10일에도 한반도 비핵화 원칙의 고수를 재확인하면서 전술핵 재배치 논의는 진행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으나, 11일 중앙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미 한국 정부가 지난해 미국 측에 전술핵 재배치를 요청한 정황이 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지난 한미국방장관회담에서 전술핵 재배치 문제를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국회에서도 이에 대한 설명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는 점은 현 정부 역시 비공식적으로는 전술핵 재배치를 선택지 중 하나로 검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북한이 문재인 정부의 모든 대화 제의를 거부하고 미국과의 벼랑 끝 협상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인 탓이 클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이 시사in 남문희 기자의 페이스북 글을 공유한 것에서도 답답한 심경이 묻어 나온다. 김경수 의원이 공유한 글은 문재인 정권이 자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카드가 없는 상태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에 발을 맞춰주는 것으로 파국을 막고 있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사정을 몰라주는 ‘대화론자’들에 대한 서운함이 실린 글이지만 상황 자체에 대한 인식은 크게 틀렸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른바 대화론자들의 비판은 이러한 사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 상황에 안주하는 상태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 할 필요가 있다. 한겨레 11일자 지면에 실린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글을 보자. 이종석 전 장관은 북한의 핵 동결과 북미 수교 및 불가침 약속을 맞교환하고 이후 국면에선 6자회담으로 비핵화 및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북한의 핵 동결을 중간 고리로 한 2단계 비핵화론과 맥을 같이 하는 걸로 볼 수 있다. 이종석 전 장관은 “이 방안이 아니라도 좋으니 평화적인 현상타파를 선도하는 독자적인 책략과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로 글을 끝맺고 있는데, 종합하면 현재의 제재와 압박 위주 대응이 아니라 취임 초의 구상으로 돌아가라는 제언으로 읽힌다.

물론 이종석 전 장관이 설명한 구상에도 약점은 있다. 핵 동결을 고리로 한 ‘딜’이 성사되더라도 이후 국면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정국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중국과 러시아는 이 ‘딜’을 통해 미국이 포기하는 것 중 하나에 주한미군 철수가 포함되기를 바랄 것이다. 만일 이 ‘딜’을 주도하는 주체 중 하나가 트럼프 미 대통령이라면 그의 고립주의적 성향이 이를 가능케 할지도 모른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감소는 ‘미국의 대리인’을 자임할 일본의 재무장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 결과는 주한미군의 영향력이 감소한 상황에서도 미국 일본 대 중국 러시아라는 패권 경쟁의 유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수소탄 실험 축하연 참석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연합뉴스)

국내 보수세력의 불안감은 바로 이 상황에서 북한이 재래식 무기로 남한을 침공할 경우 과연 이에 대응할 어떤 방안이 있겠는가에 방점이 찍혀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이종석 전 장관의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국면’ 구상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오히려 이 불안감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핵잠수함을 필두로 한 자주국방의 현실화가 필요한 것이며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에 적극적으로 편입돼야 하는 것이다. 만일 전술핵 재배치론의 현실성까지 갖춰지게 된다면 이를 지지하는 여론은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근거로 순식간에 자체 핵무장론까지 번질 것이다. 이렇게 동아시아는 또 다른 ‘화약고’가 된다.

이 가능성을 배제하고 낙관적 전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여론을 뒤집어야 한다. 대다수 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전술핵 재배치나 자체 핵무장에 대한 압도적 찬성 여론을 보이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은 배웠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비핵화니 평화군축이니 하는 허울 좋은 말들을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스스로의 힘뿐이니 그것을 기르자는 것이다.

‘가치’에 대한 신뢰는 정치와 언론이 제고해야 하는데, 이들이 오히려 이런 불안감에 편승하면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양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아예 미국으로 달려가 전술핵을 재배치하라는 여론에 불을 붙이겠다고 한다. 한때 햇볕정책을 계승한다고 했던 국민의당은 원내대표가 직접 나서서 나토식 핵공유 등을 언급하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일부 의원들도 조건부 전술핵 재배치 등을 지지하는 발언을 흘리고 있다. 언론은 대북정책을 철학이 아니라 어떤 방법론의 문제로만 서술하며 스스로 ‘병풍’이 되고 있다.

평화군축을 기반으로 한 철학이 부재하다는 점이 정파불문 드러나는 동안 원내 6석의 정의당 정도만 사드 배치 반대 등을 고리로 소심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은 비극이다. 이런 상황은 전술핵 재배치 논의를 하지 않는다는 정부가 등 떠밀려 군비확장의 길로 계속 걸어가는 것으로 이어질 뿐이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평화군축을 지지하는 수많은 시민의 목소리라는 걸 정치와 언론이 좀 더 신실한 태도로 말해야 한다. 목적지까지의 우회로를 택할 수는 있겠지만 바로 이 점에서 비핵화는 여전히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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