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은 바 있다. 그러기에 과연 이 지적인 소설이 스크린 위에 어떻게 구현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은 후 다시 처음부터 뒤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반전'이란 말로 설명되지 않는 작가의 전복적 의도 때문이었다. 글의 구성이 곧 소설의 주제의식이라 말할 수 있었던 그 '역설'을 과연 영화는 어떻게 그려냈을까?

영화를 본 내 처지는 영화 속 토니 웹스터(짐 브로드밴트 분)의 황망함에 비견될 수 없겠지만, 나 역시도 내가 읽었던 책과 내가 본 영화의 사이에서 잠시 혼돈을 느꼈다. 결국은 같은 반전을 가진 것이었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왔던 책과 영화, 그 간극에 토니처럼 역시나 나의 자의적 '해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와 소설, 그 널찍한 행간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영화는 영국 런던의 거리에서 이제는 '빈티지'가 된, 하지만 여전히 가치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토니의 카메라 상점과 홀로 아침을 맞이하는 토니의 고즈넉한(?) 생활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이혼한 전처와 홀로 새 생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그의 딸을 등장시키며, 해체된 가족을 지닌 소통불가의 한 가장이었던 사람을 설명한다. 그런 그에게 도착한 첫사랑 베로니카 어머니의 부고, 그리고 그녀의 유언으로 남겨진 고등학교 시절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그렇게 토니는 자신에게 전달된 뒤늦은 과거의 편린을 통해 과거로 흘러들어간다.

거기엔 시계를 거꾸로 차는 것이 무리의 자랑인 양 으쓱거리던 또래 청소년들의 부풀음이 담겨있는 고등학교 시절과, 전학생 에이드리언이 있다. 평범한 패거리였던 토니와 그 친구들, 하지만 선생님과 대등하게 역사를 논했던 에이드리언(조 알윈 분)은 학창 시절부터 남달랐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영화 속 수업의 한 장면으로 등장한 역사 시간, 소설은 그 시간에 보다 천착한다. E.H.카가 말한 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의 정의를 놓고 격돌한다. 에이드리언은 여기서 말한 '과거'에 반기를 든다. 허구의 역사학자 라그랑주를 인용하여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라는 주장을 펴낸다. 즉, 역사라는 것이 기록물에서 건져진 사실들을 기반으로 저술된다 했을 때, 기록물이라는 것 자체가 그 시대의 전면적인 대변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 내는 당사자의 편협된 사상을 문제로 삼았을 때, 역사는 결코 그 어떤 순간에도 객관적인 사실을 구성해 내지 못한다고 에이드리언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결국 과거의 사실이라는 것이 그것을 기록하는 그 누군가의 자의적인 역사가 될 수밖에 없는 '상대주의', 거기에 주인공 에이드리언도 작가 줄리언 반스도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에이드리언 자신이 그런 상대주의적 기억 속에 박제되어 사라진다.

빈티지가 되어가는 세대의 반성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포스터

영화는 그의 빈티지한 카메라 상점 같은 토니의 삶에 집중한다. 평범하지만 치기 어렸던 청소년시절, 거기서 만난 반짝이던 별과 같은 친구 에이드리언. 그리고 60년대의 자유분방했던 대학생 시절, 그곳에서 그가 여전히 카메라를 놓지 못한 이유가 된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가족과 운명적인 만남을 나열한다. 홀로 출산을 앞둔 만삭의 딸과 말도 섞기 힘든 노땅이 된 토니에게 전달된 한 통의 소식으로 그는 망각의 그 역사 속을 허우적거리게 된다.

현재의 토니와, 그 전처와 딸과의 관계. 즉 해체된 가족과 그 가족에서 놓여난 가장의 모습에 영화는 초점을 맞춘다. 그에게 배달된 '과거'는 굳은살이 박혀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꺼내들게 만들고, 자신을 반추하도록 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60년대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만난 베로니카, 그녀를 따라서 간 그의 집에서 만난 그녀의 가족들. 영화는 식사 자리에서 오가는 '지적인 대화'와 여자 친구의 어머니 그 이상인 분위기의 사라(에밀리 모티머 분)를 통해 청춘의 잔해를 설명한다. 그리고 전해진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교제, 그리고 그의 비극적 결말.

토니의 기억 속 과거는 거기까지다. 그리고 그에게 전달된 사라의 죽음과 그녀가 그에게 전해주려 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통해 토니는 자신이 빠뜨렸던 젊은 날의 역사 속 행간을 더듬어, 비겁하고 치졸했던 자신의 젊은 날을 목도하고야 만다. 토니의 내레이션이 등장하지만 '사건'을 중심으로 이어가는 영화는 토니의 '가족 영화'로 마무리된다. 자신의 비겁했던 과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반성하는 아버지, 그리고 이제서나마 가족들을 돌아보기 시작한 가장이라는 '가족 영화'의 전형적 구조를 따라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와 소설의 범주가 궤를 달리한다. 소설 속 청소년 에이드리언이 역사 선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저 다른 역사적 시각이 아니다. 우리가 이른바 상식이라, 객관이라 말하는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건 '객관'이 된 세대, 그리고 삶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황망한 반전으로 등장했던 에이드리언의 삶은, 그리고 그게 제기했던 그 객관에 대한 도전, 그는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그 시대가 객관적으로 예단한 삶에 반기를 든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그리고 그런 에이드리언의 맞은편에 토니가 있다. 영화 속 토니는 노땅이 된 고집불통 할아버지이지만 60년대에 청춘을 보낸 세대의 전형이다. 자유분방한 사고를 하며 그에 못지않게 자유롭게 살고 싶어 했던 세대. 하지만 그는 베로니카의 당당함과 부유하고 지적인 그녀의 가족들 앞에 위축되고, 그런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에이드리언에게 비겁했던 보통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그 졸렬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행간에 지운 채, 자신의 세대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줄리언 반스가 토니에게 보낸 과거의 기억은, 그저 토니라는 노인이 아니라 60년대 세대에게 보낸 회한의 반성문이다. 즉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라며 저물어가는 기성세대, 그 행간의 비겁을 토니라는 인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런 작가의 시대적 야심은 하지만 영화로 오면, 같은 이야기인데 개인사 혹은 가족사의 범주로 국한된다. 무엇보다 토니, 베로니카, 그리고 그의 가족, 에이드리언의 이 복잡미묘한 우정, 애정,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계급과 사상의 범주를 영화는 '스캔들'의 차원으로 치환시켜 아쉬움을 남긴다. 아버지의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의 반성을 이야기하지만,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다른 범주와 빛깔의 이야기들이다.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톺아보기 http://5252-jh.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