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에 몸담고 있는 사람치고 추석, 설이라고 제대로 쇠어본 사람 없겠지만 며느리 입장에 처해있는 사람은 그 부담이 배가 된다. 다행히 우리 시댁은 내가 하는 일을 전폭 이해하는 쪽이지만 공교롭게 창사기념일을 전후하여 김장과 제사 등이 맞물려있어 이즈음의 큰 며느리인 내 심정은 가뭄에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쭉정이와 다름없다.

올해는 다행히(?) 손이 많이 가는 특집에서 부담을 덜게 되어 3년 만에 김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김장 담그는 날을 토요일로 정하고 그에 앞서 금요일에 양념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각종 재료를 사서 각자의 역할에 부산한 가운데 무를 솜씨 좋게 체 치던 막내동서가 말한다.

"어머니, 작년에는 김치가 좀 짠것 같더라구요. 올해는 싱겁게 담가요."
"짜게 담가서 오래먹기는 했는데, 큰애가 올해는 너무 색 곱게 담지 말라고 당부하더라."

시어머니의 대답사이로 스치는 생각. '작년에는 이맘때 <신노인백서> 만드느라고 할머니들과 녹음했었지'. 둘째 동서가 말을 잇는다.

"어머니, 올해는 배추가 적은 것 같네요. 작년에는 엄청 많았어요. 해도 해도 끝이 없더라고요."
"재작년이 더 많았어. 그때 한 5백포기 했을걸?"

보태지는 내 생각 '재작년에는 <종이의 꿈> 만드느라고 서울 출장갔었던 것 같은데….'

해마다 11월말을 전후해 동서들의 경험과 다른 추억을 갖고 있는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갖지만 이내 김장과 방송의 같은 점을 찾기에 재미를 붙인다.

김장 담그기의 연출은 시어머니. 배추를 소금에 절여 씻어서 적당히 간이 배이게 한 다음 물기를 쪽 빼는 작업이나 장을 달이는 일, 각종 양념을 준비해 놓는 일은 취재해서 인서트를 편집하고 효과 음악을 골라 놓는 일과 비슷한 것 같다.

사실 양념 고춧가루에 배추를 버무리거나 녹음제작에 들어가는 것은 준비된 순서대로 일을 진행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역시 김장이나 다큐제작이나 준비 과정이 관건인 셈이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간'을 맞추는 일이다. 고춧가루와 액젓과 각종 조미료를 대형 고무통에 섞어서 '괴미'를 내는 작업이야 말로 김장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그런데 그 맛을 내는 일이 계량화 돼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미각과 경험에 의해 양을 조절하는 것이니 그것만은 솜씨좋은 시어머니 곁에 착 달라붙어서 그 맛을 익히고 감각을 느끼고 전수받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다큐 또한 다르지 않다. 방송제작에 대한 많은 서적과 자료들이 나와 있지만 내공깊은 PD의 작품을 보고 듣고 제작과정을 직간접으로 경험하면서 노하우를 쌓아가는 방법이 좋은 다큐를 만드는 비법이 아닐까.

올해는 김장을 담그면서 무청이 퍼렇게 살아있는 무 김치도 담갔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한 통에 저장하지 않고 배추 김치 사이 사이에 '박으라'고 말씀하셨다. 무 김치를 박아두면 시원한 맛이 우러나는 것은 물론 김치 통을 헐었을 때 배추 김치를 먹다가 다소 질릴 무렵 무 김치도 먹을 수 있으니 좋은 생각이다.

나는 PD의 '기획의도'를 알아차리고 매우 유익한 아이디어라고 전폭 지지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김장 담그기도 때에 따라 '창조적 접근을 통한 재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어머니는 실력과 덕성, 리더쉽을 고루 갖춘 훌륭한 연출자다. 그 연출자가 빚어내는 김치는 날이 갈수록 맛을 더할 것이다.

올해 김장 담그기의 스탭으로 참여하면서 얻은 게 많다. 시어머니의 김치 맛은 정말 특별하다. 그 맛은 아무리 용을 써도 근시일내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훌륭한 작품 한편 빚어내기가 이처럼 쉽지 않을 터, 나는 갑자기 쓸쓸해지면서 김장이든, 방송이든 훌륭한 연출자의 그 속깊은 '맛'이 무지하게 부러워진다. 나는 언제나 농익은 '맛'을 낼 수 있으려나…….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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